머리가 희끗한 한 남자가 사무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 본부장님! 큰일입니다!
남자는 집무실 모니터에 뜬 내용을 힐끗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 아... 마침 보고 계시네요. 누군가 저희 회사를 모함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아시기 전에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다급한 보고내용에도 상사는 별다른 동요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차분히 말했다.
- 내버려 두세요.
- 네?
남자는 예상 못한 대답에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당황한 남자와 달리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잔에 담긴 술을 천천히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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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게시물 하나가 리버스엔지니어링의 명성을 뒤흔들었다.
[리버스엔지니어링 신제품을 복용하고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회사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삽시간에 인터넷을 휩쓸었고, 수많은 피해 사례가 댓글로 이어졌다. 기자들은 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고 대중들도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보도내용 중 대중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약자를 위한 의약품 개발을 주장하며 면세 혜택과 지원금을 받는다는 의혹이었다. 계속해서 들쑤신 효과였을까? 어떠한 비방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회장이 움직였다.
리버스엔지니어링 본사 꼭대기층.
넓은 집무실에서 회장은 피곤한 눈으로 K를 맞았다.
- 왜죠?
회장은 가타부타 어떠한 설명도 없이 단 두 단어로 인사를 대신했다.
K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 회장님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원하시는 대답이 있으시면 그에 맞춰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장은 K를 잠시 살피는 듯하더니 별 표정 없이 말했다.
- 조사를 해보니 약속전당포 사람이었더군요. 약속전당포에서 왔다고 하면 이렇게 번거로운 쇼를 하지 않아도 절 만날 수 있었을 텐데...
회장은 쇼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지금 미디어에 돌고 있는 내용은 본인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뜻을 내비쳤다.
K는 회장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건넸다.
- 회장님이 어떤 분인지 직접 뵙고 싶었습니다. 약자를 돕겠다는 그 숭고한 이상을 가진 분을 말이죠.
숭고, 이상이라는 단어에 회장의 표정이 살짝 바뀐 듯했다. 그는 오랜 세월 진심으로 약자를 위한 약을 개발하기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K는 그 작은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 회장님은 약자를 돕는다고 했지만 현실은 다르더군요. 제품이 완벽하지 않은 걸 알면서도 약자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다던가...
회장은 옅은 비웃음을 띄며 얘기를 받았다.
- 언론에는 멋대로 조작을 했을지 몰라도 여기서 굳이 저한테 그런 억지 주장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회장의 냉정한 태도에도 K는 굽히지 않았다.
- 그렇습니까? 지금은 흙탕물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고 진실이 가라앉으면 오히려 흙탕물일 때가 더 좋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회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기업을 키우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되죠. 당신 같은 사람도 수없이 만나봤고... 뭐라 하든 저한테서는 한 푼도 받아갈 순 없을 겁니다.
회장은 더 이상 나눌 얘기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음... 제가 너무 돌려 말했나요. 저는 단지 회장님께서 하신 약속이 깨졌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회장은 약속 얘기를 듣고 움찔했다.
- 약속이 깨졌다니?
- 말 그대로 회장님이 하신 전당포와의 약속이 깨졌다는 말입니다.
- 말이 되는 소리를...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키는 것만 바라보고 일평생을 회사에 바쳤소.
회장은 정중했던 태도를 버리고 감정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 맞습니다. 그게 약속을 깨뜨린 증거입니다. 세상은 변했는데 아직도 예전 생각으로 기업을 운영하고 계시니까요. 모두가 가난했을 때 했던 그 약속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가난한 사람은 줄었는데 회사 매출은 계속 증가하는 모순을 그동안 얼마나 오랫동안 외면하신 거죠?
- 궤... 궤변 늘어놓지 말고 썩 나가시오.
회장은 집무실내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K는 아랑곳하지 않고 회장에게 다가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서류를 훑어본 회장은 손을 떨며 비틀거렸다.
- 한 가지 제안드리겠습니다. 저와 새로운 약속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리버스엔지니어링을 지켜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