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의사가 되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으로 확인 완료했습니다. 계약은 준비되면 연락드릴게요.
- 에? 지금 바로 계약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 네... 준비가 필요해서요.
방금까지 온화하던 남자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 아니! 약속만 하면 돈을 빌려준다고 해놓고. 지금 장난하는 거야!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뒤편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이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씩씩대던 남자는 앞에 다가온 이도영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헛기침을 하면서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 희진씨는 사람 보는 눈이 있네요. 저런 사람인 줄 어떻게 알고 계약을 보류하셨어요?
김희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로 신규계약 할 수 있는 여건이 안돼서 그런 거예요.
김희진이 서류를 정리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여건이라면?
- 네... 돈이... 회수가 잘 안돼서.
돈 얘기를 듣자 이도영은 고개를 숙였다.
- 그렇군요... 제가 드릴 말씀이 없네요.
- 도영씨는... 더...아...아니에요. 우선 기강씨가 있으니 기다려 보죠.
- 기강이요?
이도영은 김희진에게 무언가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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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방 안은 해가 떠도 어두컴컴했다. 창문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고 테이블 위엔 담배꽁초가 한가득했다. 방에는 구겨진 맥주캔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 냄비 속 내용물은 얼마나 지났는지 눌어붙은 채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남자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손에 쥔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핏줄이 터질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잔뜩 상기돼 있었고 흰 러닝셔츠는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 이번엔 된다...이번엔 진짜...
그는 입술을 깨물며 폰 화면을 놓치지 않았다. 손가락은 초조하게 화면을 클릭하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허벅지를 툭툭치고 있었다.
방바닥엔 숫자와 메모가 빼곡히 적힌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패턴 정리', '연속 번호' 같은 단어들이 엉망으로 쓰여 있고 그 옆엔 아이의 학교 공문 한 장이 구겨져 있었다.
전화기가 울렸다. 그는 화면을 슬쩍 보더니 무시하고 볼륨을 줄였다.
- 잠깐만... 지금이야, 지금이야...
남자는 숨조차 멈추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하지만 곧 화면에 뜬 숫자를 보고 탄식했다.
-…젠장.
폰을 손에서 던지듯 떨어뜨리며 그는 머리를 감쌌다. 몇 초 뒤 그는 조용히 주워 든 폰으로 다시 화면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삐]
- 약속전당포에서 나왔습니다.
문 밖에 김기강이 서 있었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문을 살짝 열었다. 안에 걸쇠를 걸어 놓은 채 문 틈 사이로 얼굴만 살짝 내비쳤다.
- 전당포요?저번에 오신 분한테 말씀 드렸는데... 이번 주만 넘기면 들어온다니까요. 돈이...아직 조금 묶여 있어서 그래요.
- 묶인 게 아니라 다 잃은 거 아닙니까?
김기강의 눈길이 방 안으로 향했다.
남자는 당황한 듯 몸으로 방을 가렸다.
- 그게 아니라... 조금만 기다리면 대박. 이제 곧 된다니까요. 이번엔 진짜-
김기강은 상대의 말을 끊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 약속전당포는 약속이행가능성을 기준으로 계약지속여부를 판단합니다. 현 시간부로 계약 지속
불가 판단합니다.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 계약지속이 뭐 어쩐다구요?
- 오늘부로 계약을 해지합니다.
- 아니, 잠깐. 해... 해지?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면 당신들도 좋을 거 없을텐데. 내가 돈 못 갚으면 당신들도 손해 아니야?
김기강은 남자의 눈을 쳐다보며 건조하게 얘기했다.
- 저는 손해 볼 일은 하지 않습니다.
김기강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쿡 웃었다가 갑자기 주먹으로 문을 쾅 내리쳤다.
- 어쩌라고! 그럼 맘대로 해!
김기강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를 쳐다봤다.
- 돈을 갚으시게 될 겁니다.
김기강은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 서류정리가 아직 안 끝났으니 오늘까지는 고객으로 대해드립니다. 이번 주 안에 일부라도 정리해서 연락하세요.
봉투를 문틈 사이로 건넨 뒤 김기강은 조용히 뒤돌아 멀어졌다. 문이 닫히고 남자는 멍한 눈으로 TV 화면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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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강씨가 맡은 고객이 원금과 이자를 갚았네요.
김희진이 밝게 인사하며 말을 건넸다.
김기강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인 뒤 자리에 앉아 다른 서류를 살폈다.
- 나 좀 잠깐 보자.
이도영은 김기강을 사무실밖으로 불러냈다.
- 요새 일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보기 좋네. 희영씨도 만족해하는 것 같고.
김기강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 회사가 정상화되도록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도영은 김기강에게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내밀며 말했다.
- 정상화? 마치 그동안 비정상이었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 정상은 아니죠. 받아야 할 돈을 못 받고 있으니.
이도영은 담배연기를 길게 한 모금 들이마셨다가 내뿜은 뒤 말했다.
- 전에 얘기했잖아. 약속전당포는 대부업이 아니야. 여러가지 이유로 지금의 삶을 못 벗어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거지. 그런데 그런 기회를 너무 멋대로 처리하면 안 돼.
- 사장님과 비슷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런 기회는 누가 누구에게 주는 거죠?
- 누구에게라니? 누구라도 약속을 하면 그걸 담보로 기회를 줄 수 있지.
- 그건 돈이 충분할 때 얘기죠.
- 시간 지나면 고객들이 돈을 갚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 각자 사정이 있는 거니 기다려주는 것도 우리 역할이라고.
- 기다려준다구요? 그냥 힘들다는 고객에게 돈 갚아라 얘기하기 껄끄러운 것뿐이지 않나요? 제가 요즘 그걸 대신해드리고 있는 거고.
- 그게 무슨...
- 본인에게 쌓일 감정의 부채를 핑계 삼아 회사에 부담을 떠 안기는 건 자격미달입니다.
김기강의 말에 이도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