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상도

by 공부남주

- 그냥 약속만 하면 된다구요?

- 네, 정확히 말씀드리면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저희에게 맡기시는 겁니다.

- 그런 걸로... 돈을...

여자는 미심쩍는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 고객님 입장에서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믿으셔도 돼요. 이번엔 특별히...

이도영은 특별히라는 말을 꺼냈다가 잠시 멈칫했다.

- 특별히라는 말을 하니까 더 의심스러워 보이네요. 죄송합니다.

이도영은 특유의 공손함으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러자 여자도 몸 둘 바를 몰라 엉덩이를 살짝 들어 일어서며 손을 가로저었다.


이도영은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차분히 설명했다.

- 간단히 다시 말씀드리면, 약속을 맡기시고 저희가 드리는 돈으로 ㅇㅇ금융에 빌린 돈을 갚으시기만 하면 됩니다. 더 생각하실 시간을 드릴까요?

- 아. 아니에요... 그... 그럼 계약할게요. 근데...

- 맘에 걸리시는 게 있나요?

- 어떤 약속을 할지 도통...

- 원래는 사무실 가셔서 자세히 확인받으셔야 하는데 고객님은 제가 바로 접수할 테니 떠오르는 걸로 말씀하면 됩니다.

여자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살짝 채 한참동안 허공을 바라보다가 이내 말을 꺼냈다.

- 그러면...

여자의 말을 자세히 들은 이도영은 작성한 서류와 함께 돈을 건넸다.

-수 되었고 계약 완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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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이게 말이 되냐고! 몇 주 사이에 그 연놈들이 갑자기 뭔 돈이 생겨서 원금을 갚아!

ㅇㅇ금융 사무실 밖으로 큰 소리가 퍼져나갔다.

- 그... 그게 무슨 전당포인가 뭔가에서 돈을 대신 빌렸다고...

남자 앞 직원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 말이 되는 소릴 해! 용도 담보도 없는 사람들한테 돈을 빌려주는 머저리들이 어딨어? 무슨 자선 사업가야?

직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얘기했다.

- 그런데... 진짜 돈을 갚으니까 안 믿을 수도...

- 한 두건도 아니고 지금 이게 몇 번째야. 그리고 이럴 때 어떻게 처리하는지 저번에 보여줬잖아! 띨띨아!

남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오늘 골프 연습 가야 되는데! 짜증 나게 진짜. 후. 계약서 새로 챙기고 차 대기시켜 놔.

- 근데...

- 근데? 뭐! 또!

남자는 손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직원은 뭔가 얘기하려다 말고 서류를 챙겼다.

- 아닙니다. 차 빨리 대기시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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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반지하 방, 습한 찬 공기 속에 한 남자가 벽에 기댄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얼굴은 핼쑥하고 드러난 손마디의 뼈도 앙상해 보였다.

검은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차림새와 어울리지 않게 거친 손짓으로 어깨를 툭툭 치며 윽박질렀다.


- 이게 말이야, 방구야? 누구 맘대로 돈을 다른 데서 빌려? 어? 우리 사이가 막 그런 은 사이 아니잖아?


깡마른 남자는 겁에 질린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 혀... 형한테 얘기해 주세요...


그러자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벽을 발로 툭 찼다.

- 형? 니 잘난 형? 지금 없으니까 너한테 얘기하는 거 아니야!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에 있던 직원은 불안한 듯 밖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 됐고. 어쨌든 여기 계약서 다시 갖다 놨으니 니 형이랑 봐.


남자는 한숨을 한번 길게 쉰 뒤 느긋하게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반지하 창문 위쪽 벽에 기대어 담배를 꺼내 물고 직원에게 훈계를 시작했다.


- 야. 봐봐. 하면 되잖아. 상황 봐서 윽박지르고 달래고 그러면 된다고. 이게 뭐가 어려워. 쉽지?


직원이 고개를 짝 끄덕였다.


그는 반지하 창문을 내려다보며 비웃듯 말했다.

- 이제 한 달쯤 지나면 돈을 어떻게든 다시 만들어 올 테니 두고 봐.


그 순간 옆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남자소리 나는 쪽으로 뒤를 돌아봤다.

이도영이었다.


이도영의 눈빛은 평온했지만 체격이 상대적으로 좋다 보니 상대방 입장에선 살짝 주눅이 들었다.

남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 뭐... 뭐야 넌?


이도영은 남자에게 대꾸하지 않고 직원 앞에 멈춰 서더니 얘기했다.


- 지난번에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다시 찾아오면 그만한 각오를 하고 오시라고.

직원은 이도영에게서 한걸음 물러나며 더듬더듬 말했다.

- 네... 제가 다시 찾아온 건 아니고. 저희 형니... 아니 사장님이 한번 와보셔야 한다고...


남자가 방귀를 뀌며 직원을 옆으로 밀어내고 이도영 앞에 섰다. 남자는 손을 들어 이도영의 한쪽 어깨를 힘주어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도영은 살짝 당황한 듯한 남자의 손을 우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 당신네 회사와의 계약은 종결되었습니다. 시는 찾아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자는 옆의 직원을 흘끗 보더니 뭔가 알았다는 듯 이도영에게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얘기했다.


- 아~ 당신이 그 전당포 뭐시기 구만? 뭔 사기를 거나하게 치려고 별 볼일 없는 우리 고객을 뺏어가? 이 바닥에도 상도가 있는 건데 이게 무슨 경우야. 우리가 먼저 찜한 데를 이렇게 뺏어가도 되는 거야?


이도영이 한 걸음 다가가며 조용히 말했다.


- 잘 못 보신 것 같습니다. 저희도 고객에게 돈을 빌려주는 업을 하고는 있지만... 저희는 고객의 미래를 담보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고객의 과거를 담보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남자는 그 말을 듣고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갈며 말했다.

- 이 자식이… 어디서 훈계질이야?!


그리고 이도영을 향해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이도영은 몸을 살짝 틀어 피하며 여유롭게 한 걸음 물러섰다. 남자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휘청였고 곧바로 이를 악물며 다시 덤벼들었다.

이도영이 가볍게 손을 뻗어 남자의 팔목을 낚아채고 반대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눌렀다.


쾅!


남자의 어깨가 창문 위 벽에 부딪혔다.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돌려 소리 질렀다.

- 이거 안 놔!


이도영은 그를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 가만히 계신다고 약속하면 놔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이도영의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침을 삼켰다.

- 알았어. 놔줘 봐

이도영은 잡고 있던 손을 살짝 떼며 뒤로 물러섰다.


- 이제 이해하셨을 테니 말씀드린 약속은 꼭 지키세요. 그럼 이만.


이도영이 돌아서며 걸음을 떼는 순간.


스윽.


남자의 손이 주머니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그의 손가락이 주머니 안에서 작은 접이식 칼을 펼쳤다.

그리고 이도영이 방심했다고 생각한 순간


휙!

그는 빠르게 주머니에서 칼을 뽑아 이도영의 등 뒤를 향해 찔렀다.


척!

하지만 이미 이도영의 손이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목에 서서히 힘이 가해지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도영은 차갑게 눈을 내리깔았다.


- 더 하실 이 있나요?

툭하고 칼이 바닥에 떨어졌고 이도영은 칼손잡이를 발로 차서 멀찌감치 치워버렸다.

남자는 그제야 완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이도영을 올려다보았다.


이도영은 손목을 비틀어 그의 몸을 반쯤 돌리더니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 한 번은 참지만 두 번은 참지 않습니다.

남자는 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영이 손을 놓자 그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푹.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뒷걸음치는 남자의 뒤로 누군가 서 있었다. 누군가 찌른 칼에 복을 입은 남자는 어깨를 붙잡고 쓰러졌다. 쓰러진 남자 위로 누군가 올라타더니 있는 힘껏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하기 시작했다.

이도영은 재빠르게 달려가 공격하는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내려치는 주먹의 세기로 짐작컨데 분노로 가득할 거라 생각했던 남자의 표정은 예상과 달리 무표정한. 아니 너무나 평온한 모습이었다.

- 그만두세요. 이러다 죽습니다.

- 아니요. 죽지 않아요.

- 그게 무슨?

-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게 한다면서요. 말로만 하면 안 돼요. 확실히 해야죠.

이도영은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반지하 창문아래서 남자아이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 혀... 형...

이도영은 뒤를 돌아보고 재빨리 상황을 파악 뒤 남자를 다시 자세히 살펴봤다.


- ... 여기 얼마 전에 계약했던 그...

- 네. 기억시네요. 김기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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