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가 떠난 후 전당포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약해지고 있었다.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다들 무엇이 문제였는지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했다.
신규고객을 받을 자금이 없다는 것보다는 이미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가진 게 없는 이들에게 이자 독촉을 하거나 대출금을 받아내는 것은 대부분 K의 몫이었다.
- 이번 달까지만 기다리죠.
그렇게 고객들에게 한 번, 두 번 유예를 주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감사가 아니라 무책임한 선택이었다.
- 다음 달까지는 꼭.
라고 말한 이들의 대부분은 다음 달이 다시 그다음 달이 되었다.
김희진은 맡긴 약속을 찾아갈 만한 강제성이 필요하다고 사장에게 여러 번 건의했다.
하지만 사장 기필준은 매번 고개를 저었다.
- 약속 전당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야. 우리가 믿지 못하면 그 약속도...
그 말은 맞았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이 달랐을 뿐.
그날도 하루 종일 고객 하나 없는 오후였다.
전당포 문을 열고 정장 차림의 남자가 들어섰다.
자신을 강혁수라고 소개한 그는
차분하고 정중한 말투로 사장을 찾았다.
웃고 있었지만 정감이 가지는 않는 사내였다.
- 사장님, 저는 여기 물건 맡기러 온건 아니구요. 제안을 하나 하러 왔습니다.
그는 제안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 제안이요?
- 네, 거두절미하고 바로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약에 대한 데이터를 모으고 있습니다. 감각을 통제하는...
그의 제안은 이러했다. 제작한 샘플을 고객에게 사용하고 결과를 공유해 주면 보수를 지급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 그런 제안을 왜 저에게 하시는 거죠?
강혁수는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한 어투로 얘기했다.
- 당연히 전당포에 보유하고 있는 고객들 중에 지원자가 많을 테니까요.
기필준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 글쎄요.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네요. 그런 제안은 받을 수 없습니다.
강혁수는 기필준의 거절에 추가 설득 없이 웃으며 명함을 꺼내 책상에 올려두었다.
- 샘플은 놓고 가겠습니다. 미각용 샘플입니다.
-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 생각나시면 연락 주세요. 필요할 겁니다.
그날 밤 기필준은 사무실에 혼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마지막말이 기필준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기필준은 고요한 전당포 안 자신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 형... 어쩌면 좋을까요?
그는 강혁수의 명함을 집어 들었다.
[리버스 엔지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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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포 안
탁자 위에 놓인 검은 케이스 하나.
그 안에는 강혁수가 두고 간 '약품 샘플'이 들어 있었다.
기필준은 말없이 케이스를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샘플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 안에는 주사기와 투명한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병 여러 개가 담겨있었고 색이 다른 두 개가 짝지어져 있었다. 하나는 작용제 다른 하나는 해독제로 추정되었다.
기필준은 소매를 걷고 주사기에 액체를 천천히 주입했다.
그러고는 김희진을 불렀다.
- 나한테 이것 좀 놔줘.
- 네? 뭘 놔요?
- 내가 혼자 하기 좀 어려워서... 하하
-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이걸 왜 놓는 건데요?
- 한번 테스트해보려고. 보수도 준다잖아?
김희진은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 사장님, 정신 차리세요. 그깟 보수 때문에 어떨지도 모르는 약을 넣어요? 회사는 제가 잘...
기필준이 말을 끊고 얘기했다.
- 어떨지 몰라서 해보는 거야.
- 네?
- 강제성이 필요하다며? 고객에게 하기 전에 나한테 해보는 거야.
김희진은 기필준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 제가 자꾸 무리한 얘기를 해서 그러신 거면 안 그러셔도 돼요.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 아니야. 오히려 내가 그동안 고집을 부린 것 같아.
김희진은 계속 망설이다 기필준의 재촉에 못 이겨 주사기를 손에 들었다.
- 살살 놔줘.
- 희진 씨, 저한테 놔주세요.
둘은 동시에 문쪽을 쳐다봤다.
이도영이 어느새 건장한 팔뚝을 내보이며 둘에게 다가왔다.
- 사장님은 저리 비키세요.
이도영이 다가와 사장을 옆으로 밀어내며 얘기했다.
기필준은 이도영에게 손짓하며 얘기했다.
- 괜히 참견하지 말고 너 할 일이나 해.
- 제가 사장님보다 이런 건 더 잘할 것 같아요.
- 무슨 비타민 주사 맞는 줄 알아?
기필준은 허락하지 않았고 서로 간의 강대강 대치는 계속되었다. 두 남자는 숨을 죽인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 그럼 가위바위보라도 하세요!
김희진이 보다 못해 소리 질렀고 긴장되었던 분위기가 순간 풀렸다.
- 책임은 사장이 지는 거야. 그만 포기해.
- 사장님은 절 책임지셔야죠.
굵은 팔뚝을 타고 선명하게 부풀어 오른 혈관 속으로 액체가 주입됐다. 차가운 감촉이 피부 안쪽을 기어 다니듯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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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한 사무실 한가운데
커다란 가죽 의자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담배 연기가 천천히 천장으로 퍼졌다.
- 전당포 반응은?
- 네. 예상대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 샘플은 두고 왔고 설계도 거의 마무리되었습니다. 완료되는 데로 실행에 옮기겠습니다.
남자는 창 밖을 보며 웃는 건지 어떤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