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 시... 뮬레이터? 이게 뭐예요?
기필준 등 뒤로 다가온 김희진이 모니터를 쳐다보며 물었다.
- 음... 뭐라도 좀 해보려고...
- 사장님. 앞으로 뭐든 저랑 상의하고 하세요. 지난번에도...
김희진이 눈을 흘기며 얘기하는데
누군가 전당포 문을 슬며시 밀며 들어왔다.
김희진이 문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밝게 인사했다.
- 어서 오세요. 약속 전당포입니다.
전당포에 들어선 여자의 손엔 깊게 팬 주름과 숱한 세월이 녹아 있었지만 눈빛만은 어린아이 같았다.
그녀는 잠시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돈을 빌려준다고 해서 왔어요.
김희진은 그녀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 네, 여기는 약속전당포구요. 약속을 맡기시면 돈을 빌려 드립니다.
그녀는 약속이라는 말에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 우리 아들 제대 날이 얼마 안 남아서, 선물을 하나 사야 하는데... 제대할 때는 내가 꼭 마중 나가겠다고 약속했어요.
그 순간 김희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나이가 지긋한 그녀의 입에서 아들의 제대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김희진이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동안, 뒤편에 앉아 있던 기필준이 다가왔다. 기필준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직접 말을 이었다.
- 아드님이 군에 계시는군요. 오랜만에 만나시겠어요.
기필준의 자연스러운 말투에 그녀는 미소를 머금으며 편안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제 곧 만날 생각을 하니까 잠도 잘 안 오네요.
기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희진에게 말했다.
- 신분증 확인하고 필요한 만큼 드리도록 해.
김희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필준의 말에 따라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기필준은 그녀를 의자에 편하게 앉히고 차 한 잔을 건네며 대화를 나눴다.
돈을 받은 그녀는 기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전당포 문을 나섰다. 그녀의 작고 구부정한 뒷모습이 사라지자 김희진은 기필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 이상하지 않으셨어요? 아들이 제대를 한다고…?
기필준은 조용히 말했다.
- 어. 도영이한테 연락 좀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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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병소 위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차가운 산기슭의 바람이 날카롭게 뺨을 스쳤다. 초소 앞에 서있던 병사 한 명이 저 멀리 비탈길을 올라오는 작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혼잣말을 했다.
- 진짜로 오셨네...
옆에 서 있던 일등병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누구 말씀이십니까?
상병은 손가락으로 초소 아래쪽을 가리켰다.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올라오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녀는 쉬었다 걸었다를 반복하며 오르막을 올라오고 있었다.
- 저 할머니 해마다 오시는 분 이래. 아들 본다고.
- 해마다 말입니까?
- 자세한 건 나도 모르는데. 여기서 군생활하다가... 아무튼 제대한다고 알려준 날짜에 맞춰 해마다 저렇게 찾아오신다더라.
일등병은 순간 표정이 굳었다.
- 그럼... 어떻게 합니까?
상병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적당히 둘러대야지. 쓸데없이 사실대로 말했다간... 아들은 방금 먼저 나갔다고 말하고 돌려보내.
- 그게… 그래도 괜찮습니까?
- 그럼 우리가 뭐 어쩔 건데?
상병은 한숨과 함께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녀는 조금씩 위병소에 가까워졌고 상병은 일등병을 향해 작게 얘기했다.
- 괜한 생각 말고 하란대로 해.
- 네, 알겠습니다.
두 병사는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그녀는 초소 앞에 서자 힘들게 숨을 돌리며 말했다.
- 우리 아들… 제대한다고 편지를 받았는데…
일등병은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대답했다.
- 아. 네... 아드님이 조금 전에 먼저 내려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상병이 미간을 찌푸리며 일등병에게 눈치를 주는 찰나
아래쪽에서 군인 한 명이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성큼성큼 다가오며 외쳤다.
- 엄마. 저 여기 있어요.
그녀는 천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고 그녀의 떨리는 뒷모습을 쳐다보며 두 병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 이 눔아. 고생했다. 이제 엄마 품에 오너라.
기필준은 비탈길에 세워둔 차에 기대어 포옹하는 둘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