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기필준은 모자를 눌러쓰고 전당포 밖으로 나왔다. 정확한 정보가 없는 탓에 우선 박기진이 잠입한 빌딩으로 향했다.
높게 솟은 빌딩 앞에 도착한 기필준은 차분히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정문의 유리문은 물론 옆문과 후문 역시 잠금장치로 단단히 잠긴 상태였다.
숨을 한번 고른 뒤 빌딩 주변을 차분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주변 CCTV 카메라의 붉은 불빛이 마치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회전하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 있던 그의 휴대전화가 조용히 울렸다.
- 사장님, 헛걸음하신 것 같네요.
강혁수였다.
- 전화한 것을 보니 헛걸음은 아닌 것 같은데?
기필준의 음성은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 사장님, 본전 챙기려다 갖고 있는 것도 다 잃습니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강혁수지만 기필준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 듯했다.
강혁수는 음흉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 이제 사무실에는 사무직원 한 명만 남아 있겠네요?
기필준의 눈썹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
- 사무직원?
기필준은 사무직원이라는 말에 잠시 회상에 잠겼다.
[2년 전]
사무실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이국적인 외모의 여성이 들어왔다.
- 여기가 약속전당포 맞나요?
기필준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 네, 맞긴 한데 지금은 잠시 휴업 중이라...
여자는 사무실을 둘러보며 얘기했다.
- 여기 사장님을 좀 뵙고 싶은데요.
- 무슨... 용건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여자는 기필준에게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 계약을 해지하려고 왔습니다.
기필준은 여자가 건넨 계약서를 훑어봤다.
[계약서]
계약자명 : 김영철
약속내용 : 비밀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는다.
.....
계약서를 본 기필준은 옛 기억이 또렷이 떠올랐다.
잊을 수 없는 계약서. 기필준이 계약한 첫 계약이었기 때문이다.
- 이... 이걸 어떻게?
여자는 기필준의 반응을 보더니 뭔가 알았다는 듯 얘기했다.
- 혹시 사장님이세요?
기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 이 계약서는 고객님 계약서가 아니잖아요. 이건 예전에...
- 네, 맞아요. 이건 아빠가 계약한 거죠.
- 아... 빠요?
- 네. 아빠가 저에게 물려주신 거예요.
기필준은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고는 천천히 설명했다.
- 죄송하지만 잘 모르고 오신 것 같습니다. 약속전당포는 약속을 담보로 저희가 돈을 빌려드리는 곳입니다. 계약을 해지하면 고객님이 돈을 저희한테 갚으셔야 되는 거예요. 약속 말고는 저희가 돌려드리는 유산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는 기필준의 말에 조금의 동요도 없이 얘기했다.
- 네. 알고 있어요. 담보인 약속의 비밀도 제가 알고 있구요. 그 비밀을 얘기하고 당시 아빠가 받았던 돈도 갚으려구요.
기필준은 머쓱해하며 계약서를 여자에게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 아. 그런 건가요... 제가 오해했네요. 하지만 비밀을 저에게 알려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 필요 없다구요?
기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이 계약은 제가 직접 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형... 아니 초대 사장님과 한 약속인데... 어차피 그걸 약속한 사장님은 예전에 돌아가셨어요. 비밀을 약속한 당사자가 없단 말입니다.
여자는 기필준을 진정시키려는 듯 두 손을 아래로 누르는 제스처를 하며 얘기했다.
- 네. 맞아요. 그래서 사장님이 들으셔야 해요. 그날... 초대 사장님을 공격한 사람이... 저희 아빠예요.
여자의 말에 기필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 돈이 필요해서 범행을 저질렀지만 누군가를 해하려고 한건 아니에요. 그리고 실제 범행하려고 마음먹은 건 초대 사장님이 아니라... 바로... 앞에 계신 사장님이었다고 했어요. 인상착의가 비슷했는데 밤이기도 했고... 돈가방을 들고 있었다고...
조용히 상대의 말을 듣고 있던 기필준이 나지막이 물었다.
- 그런데... 왜... 형이 그런 약속을...
- 초대사장님이 저희 아빠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고 했어요. 아마도 어린 저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 것 아닐까...
여자의 말을 들은 기필준은 뭐라 말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 그걸 왜... 이제 와서...
-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얘기했어요.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기필준이 말을 떼었다.
- 쉽지 않았을 텐데 용기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돈은 안 갚으셔도 됩니다. 형이 한 약속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돈은 전당포돈이 아니었어요. 전에 한 형사님이 구해주신 돈이라...
- 네. 어차피 지금 갚을 돈은 없어요.
여자의 당돌한 대꾸에 기필준이 놀라 쳐다보며 물었다.
- 네?
- 말했잖아요. 물려받은 건 계약서 하나라고요. 대신 제가 여기서 일해서 갚을게요.
기필준은 여자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 네. 어떤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빚은 없다고 생각하셔도 되니 신경 쓰지 마시고 돌아가세요.
단호한 기필준의 대답에도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 저희 아빠가 한 일 때문에 제가 싫으신 거죠?
기필준은 측은한 표정으로 말했다.
- 그런 게 아닙니다. 사무직원은 뽑지 않습니다. 여느 전당포처럼 생각하시면 안돼요. 위험합니다.
- 사무직원요? 저 이래 봬도 검도 국가대표 출신인데... 사무직은 좀이 쑤셔서 적성에 안 맞아요.
-...
- 멜리나라고 불러주세요. 저희 엄마 이름이에요.
잠시 회상에 잠겼던 기필준이 CCTV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 뭔가 착각한 것 같네. 전당포에 사무직원은 나 밖에 없어.
띵동. 기필준에게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사장님, 말씀하신 데로 리엔에서 사람들을 보냈네요. 처리 완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