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계약해지

by 공부남주

[현재]


기필준은 모자를 눌러쓰고 전당포 밖으로 나왔다. 정확한 정보가 없는 탓에 선 박기진이 잠입한 빌딩으로 향했다.

높게 솟은 빌딩 앞에 도착한 기필준은 차분히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정문의 유리문은 물론 옆문과 후문 역시 잠금장치로 단단히 잠긴 상태였다.


숨을 한번 고른 뒤 빌딩 주변을 차분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주변 CCTV 카메라의 붉은 불빛이 마치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회전하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 있던 그의 휴대전화가 조용히 울렸다.

- 사장님, 헛걸음하 것 같네요.

강혁수였다.


- 전화한 것을 보니 헛걸음은 아닌 것 같은데?

기필준의 음성은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 사장님, 본전 챙기려다 갖고 있는 것도 다 잃습니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강혁수지만 기필준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 듯했다.

강혁수는 흉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 무실에는 사무직원 한 명만 남 있겠네요?


기필준의 눈썹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

- 사무직원?

기필준은 사무직원이라는 말에 잠시 회상에 잠겼다.


[2년 전]


사무실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무잡잡한 피부에 이국적인 외모의 여성이 들어왔다.

- 여기가 약속전당포 맞나요?

기필준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 네, 긴 한데 지금은 잠시 휴업 중이라...


여자는 사무실을 둘러보며 얘기했다.

- 여기 사장님을 좀 뵙고 싶은데요.

- 슨... 용건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여자는 기필준에게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 계약을 해지하려고 왔습니다.


기필준은 여자가 건넨 계약서를 훑어봤다.


[계약서]

계약자명 : 영철

약속내용 : 비밀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는다.

.....


계약서를 본 기필준은 옛 기억이 또렷이 떠올랐다.

잊을 수 없는 계약서. 기필준이 계약한 첫 계약이었기 때문이다.


- 이... 이걸 어떻게?

여자는 기필준의 반응을 보더니 뭔가 알았다는 듯 얘기했다.

- 혹시 사장님이세요?

기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 이 계약서는 고객님 계약서가 아니잖아요. 이건 예전에...

- 네, 맞아요. 이건 아빠가 계약한 거죠.

- 아... 빠요?

- 네. 아빠가 에게 물려주신 거예요.


기필준은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고는 천천히 설명했다.

- 죄송하지만 잘 모르고 오신 것 같습니다. 약속전당포는 약속을 담보로 저희가 돈을 빌드리는 곳입니다. 계약을 해지하면 고객님이 돈을 저희한테 갚으셔야 되는 거예요. 약속 말고는 저희가 돌려드리는 유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기필준의 말에 조금의 동요도 없이 얘기했다.

- 네. 알고 있어요. 보인 약속의 비밀도 제가 알고 있구요. 그 비밀을 얘기하고 당시 아빠가 받았던 돈도 갚으려구요.


기필준은 머쓱해하며 계약서를 여자에게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 아. 그런 건가요... 제가 오해했네요. 하지만 비밀을 저에게 알려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 요 없다구요?


기필준은 개를 끄덕였다.

- 이 계약은 제가 직접 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형... 아니 초대 사장님과 한 약속인데... 어차피 그걸 약속한 사장님은 예전에 돌아가셨어요. 비밀을 약속한 당사자가 없단 말입니다.


여자는 기필준을 진정시키려는 듯 두 손을 아래로 누르는 제스처를 하며 얘기했다.

- 네. 맞아요. 그래서 사장님이 들으셔야 해요. 그날... 초대 사장님을 공격한 사람이... 저희 아빠예요.


여자의 말에 기필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 돈이 필요해서 범행을 저질렀지만 누군가를 해하려고 한건 아니요. 그리고 실제 범행하려고 마음먹은 건 초대 사장님이 아니라... 바로... 앞에 계신 사장님이었다고 했어요. 인상착의가 비슷했는데 밤이기도 했고... 돈가방을 들고 있었다고...


조용히 상대의 말을 듣고 있던 기필준이 나지막이 물었다.

- 그런데... 왜... 형이 그런 약속을...

- 초대사장님이 저희 아빠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고 했어요. 아마도 어린 저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 것 아닐까...

여자의 말을 들은 기필준은 뭐라 말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 그걸 왜... 이제 와서...

-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얘기했어요. 갚아야 빚이 있다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기필준이 말을 떼었다.

- 쉽지 않았을 텐데 용기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돈은 안 갚으셔도 됩니다. 형이 한 약속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돈은 전당포돈이 아니었어요. 전에 한 형사님이 구해주신 돈이라...

- 네. 어차피 지금 갚을 돈은 없어요.

여자의 당돌한 대꾸에 기필준이 놀라 쳐다보며 물었다.

- 네?

- 말했잖아요. 물려받은 건 계약서 하나라고요. 대신 제가 여기서 일해서 갚을요.


기필준은 여자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 네. 어떤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빚은 없다고 생각하셔도 되니 신경 쓰지 마시고 아가세요.

단호한 기필준의 대답에도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 저희 아빠가 한 일 때문에 제가 싫으신 거죠?

기필준은 측은한 표정으로 말했다.

- 그런 게 아닙니다. 사무직원은 뽑지 않습니다. 여느 전당포처럼 생각하시면 안돼요. 위험합니다.

- 사무직원요? 저 이래 봬도 검도 국가대표 신인데... 사무직은 좀이 쑤셔서 적성에 안 맞아요.

-...

- 멜리나라고 불러주세요. 저희 엄마 이름이에요.




잠시 회상에 잠겼던 기필준이 CCTV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 뭔가 착각한 것 같네. 전당포에 사무직원은 나 밖에 없어.


띵동. 기필준에게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사장님, 말씀하신 데로 리엔에서 사람들을 보냈네요. 처리 완료했습니다.]

이전 07화36화. [에피소드] 그날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