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비한 식당가 앞에서 구수한 군밤 굽는 냄새가 낯선 길을 가는 나그네를 유혹한다. 그 익숙한 냄새에 이끌려 한 봉지 사자마자 잘 익은 노란 알밤 하나를 냉큼 입에 넣는다. 나머지는 봉지째 주머니에 넣으니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고 든든하여 길동무가 생긴 것 같다. 보물 찾기라도 나선 사람처럼 신기하게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호젓한 길 양편에 가득한 단풍이 가을 잔치의 초대장 같이 흔들린다. 주차장에서 겨우 몇 걸음 더 온 것뿐인데 높은 산자락과 우뚝한 나무들이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여 신선의 세계에 들어선 것 같다. 포근하다, 아름답다, 고요하다 같은 흔한 말로 표현해도 흔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품은 길이 시작된다.
그 길을 따라 오 분쯤 가니 산정호수 둘레길이 나타났다. 하늘이 준 선물같이 푸르고 높은 산. 그 아래 드넓은 하늘과 가을 잎을 머금은 산정호수는 명성산의 전설을 담담히 전하고 있다. 그 옆에는 이곳을 피난처로 삼아 울부짖었던 궁예의 동상이 그의 한을 짚고 서 있다. 서럽게 태어나 한 때의 영광을 거머쥐었다가 끝내는 사람들의 돌팔매에 목숨을 잃는 운명으로 돌아간 그는 산정호수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중략)
명성산은 원래 이런가 하며 한 이십 분 오르니 앞서갔던 등산객들이 넓은 바위에 걸터앉아 쉬면서 에구구, 아이고, 하며 아우성이다. 누구라도 만나니 반가워 슬쩍 그 곁에서 쉴 곳을 찾는다. 땀을 식히며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바윗길 양편으로 늘어선 나무와 햇살 아래 반짝이는 가을 잎들이 내게 인사하며 때맞춰 물든 얼굴을 한꺼번에 내민다. 분명 그들은 지나온 길에서 함께 했는데도 앞만 보고 오느라 그 다정한 얼굴을 보지 못했다. 순간 굽이굽이 지나온 내 삶의 시간들과 그 길에서 함께 한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 삶이 무겁다고 그들에게 감사를 놓친 것 같다.
눈앞에 펼쳐진 가을 잎의 잔치에 취해 땀을 식히고 또 다른 가을의 얼굴을 찾아 산길을 계속 오른다. 도시의 삶에 지쳐 있다가 숲에 돌아온 원숭이처럼 산 기운에 힘을 얻어 이쪽저쪽 두 손으로 바위를 짚어가며 운총처럼 익숙하게 바위를 오른다. 대학 다닐 때 우리들이 돌려 읽던 소설 속에 나오는 임꺽정의 부인 운총. 강의실에서는 골골대던 내가 산에 가서 펄쩍펄쩍 잘 다니니 한 선배가 산이 체질이냐며 나를 운총으로 불렀던 기억이 난다. (중략)
억새밭으로 가는 길에 궁예 약수터가 있다. 궁예의 삶처럼 안타깝게도 물은 마르고 터만 남아있다. 그곳을 지나 약간의 경사가 있는 흙길을 살짝살짝 미끄러지며 내려간다. 조심하며 내려가도 흙이 콩가루처럼 고와서 먼지가 심하게 올라온다. 급하게 억새에게 다가서는 마음을 서두르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 같다. 드디어 ‘억새는 으악새의 다른 말’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넓게 펼쳐진 억새밭이다.
억새밭 주변에는 엄마 아빠와 함께 손잡고 온 초등학생들이 보인다. 이 포근한 억새의 춤이 앞으로 오랜 시간 가족에 대한 추억으로 자리 잡으리라. 따뜻한 햇살 아래 펼쳐진 억새 가족과 이들을 찾은 가족 등산객들 머리 위로 한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의 악보에 맞추어 부르는 억새의 노래가 들린다.
누가 이 높고 메마른 산 위에 흰 물새의 깃털을 모아 놓았나?
저녁 햇살의 은빛만을 빼어 모아 바람 따라 물결치는 억새의 춤이여!
단풍잎처럼 화려하지 않고 파란 하늘처럼 선명하지도 않지만,
아름답구나! 갈잎보다 겸손한 억새의 마음이여!
높은 산에서 시름겨운 사람 품는 천사의 날개여라!
억새는 갈대와 닮았지만 갈대와 달리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 모여 산다. 가파른 달동네에 모여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흰옷 입은 백성 같기도 하다. 혼자서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지만 때로는 들불처럼 일어나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키고 사람처럼 살 권리를 주장했던 민초들의 역사. 억새가 이 험한 산 위에 부르는 노래는 외롭고 약한 그들의 노래이고, 함께하는 아름다운 힘을 보여주는 세상이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