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2. 이상한 선물: 마이너스 캘린더
2. 이상한 선물: 마이너스 캘린더
늦은 저녁 연휴 첫날을 뿌듯하게 보냈구나 생각하면서 탁상 달력을 봤다. 남은 4일에는 그냥 집에 있을까? 인도 할머니는 무사히 가셨을까? 그분은 아마도 힌두교도이실테고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에 속하겠지? 온갖 생각들이 돌아다니다 딱 멈춘 곳이 ‘정수기 살균 소독’이었다. 정수기 살균 소독을 할 때가 되어 가는데... 나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 캘린더에는 대략 3년간의 살균 소독과 비데 필터 교체, 화분에 물주는 시기, 어머니 요양원 방문일, 아버지 기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정수기 살균 소독은 3개월, 비데 필터는 6개월, 화분은 지난번 기록을 보면서 계절에 따라 4주 전후로 물을 주고 있었다. 9월에는 특별히 신경써야 할 일은 없고, 10월 9일에 소독, 그런데 이게 뭔가 캘린더에 보라색 글씨가 보였다.
캘린더에는 빨간색과 검정색 글자밖에 없는데 보라색 글씨라니 그것도 진하게 ‘이사’라고 쓰여 있었다. 이사하려고 어제 공인중개사무소에 집을 내놓기는 했으나 아직 이삿날이 잡힌 것은 아니었다. 물론 집이 팔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집을 사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내가 ‘이사’를 핸드폰 캘린더에 기록한 적이 없다. 그것도 색깔을 달리해서?
아직 확정되지 않은 거라 삭제하려고 ‘이사’를 터치하니 10월 19일 오전 10시부터 통상적인 한 시간이 표기되어 있었고, g메일도 내 계정이었다. 알림은 30분 전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단 오른쪽 휴지통 삭제 아이콘이 비활성화 상태라 ‘이사’를 지울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반복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0월 19일 ‘이사’, 11월 15일 ‘심근경색’, 이게 뭐지? 내가 아프다는 건가? 12월 24일 ‘퇴직’ 통보, 크리스마스 이브에 퇴직? 허거덕! 2025년 1월 31일 어머니 장례식, 쿵! 가슴이 통째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으~~ 정말 뭘까? 말도 안되는 진한 보라색 글씨! 손이 떨렸다. 겁이 덜컥 나고 당황스러워 깜빡일 수조차 없는 눈은 이미 2월에 가있었다.
2월 17일 ‘재취업’, 3월 16일 ‘결혼식’, 결혼식? 결혼이라니! 내 나이 49세, 그러니까 ‘만 나이 통일법’ 시행에 따라 나는 올해 49세다. 그리고 이미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결혼이라고? 만나는 사람도 없는 이 상황에 내년 3월 결혼이라니! 6개월도 남지 않았다. 물론 좋은 사람 만나면 좋겠지만 결혼은 또 다른 문제다. 후~~ 한숨이 나왔다.
질병과 장례식에 결혼까지 할 말도 없게 만드는 것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4월 10일 파생상품 투자 실패, 5월 1일 휴직, 6월 16일 이혼, 이쯤이면 이것은 장난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난이거나 바이러스에 걸렸거나 둘 중 하나겠지, 석 달 만에 또 ‘이혼’이라니! 잠깐! 7월 20일 교통사고.
투자 실패, 이혼, 교통사고...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다. 설상가상 전호후랑 첩첩산중이구나! 8월 15일 나를 다시 찾은 날, 9월 13일 50년을 위한 여행.
이제 겨우 늪에서 헤어나 맨바닥에 발을 붙였고, 끝없이 떨어지는 나락에서 벗어나 뭐라도 해보려 늘 애쓰고 있는데 더 떨어져야 한단 말인가, 누가 봐도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또다시 우울에 빠지거나 그런 상황에 절대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이상은 질 수 없다!
9월 13일 이후에는 진한 보라색 글씨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이 추석 연휴 첫날 9월 14일. 2024년 9월 14일부터 2025년 9월 13일까지 정확히 1년 동안 저렇게 말도 되지 않는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인도 할머니의 1년 선물이란 게 혹시 이것을 말한 것일까? 미리 주겠다는 말은 그러니까 한국말이 서툴러서가 아니라 1년을 미리 알려준다고 한 것이었을까? 그녀의 딸은 컴퓨터공학을 전공한다 하는 시대에 어디 웹툰 혹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해괴망측한 상황을 나보고 믿으라고?
잠을 자기엔 이미 틀렸다. 나는 인터넷에서 스마트폰 신종 바이러스, 스마트폰 악성코드, 인도 할머니, 예언자, 미래를 알려주는 캘린더 등등 생각나는 대로 검색했다. 심지어 ‘삼재’인가 해서 삼재도 검색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좋은 선물도 아니고, 살아내느라 애쓰며 발버둥치고 있는 나한테 청천벽력 같은 일들이 또 남아 있다니! 가당한 일이 아니다.
좋게 생각하자. 좀 전에 본 그것은 내일이면 사라져서 아무 일 없는 상태로 될 것이다. 진짜 그렇지 않다면 인도 할머니는 나에게 일어날 나쁜 일들에 대해 미리 대비하라는 뜻으로 1년을 선물한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미래를 알려주는 캘린더’라기 보다 아주 그냥 ‘마이너스 캘린더’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지도 모른다.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전환시키는 계기로 바꿔야 하겠다.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자 철렁 내려앉았던 심장이 안정을 되찾았다. 두려움과 무서움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견디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좋은 선물이라면 나를 도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