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3. 10월 19일 토요일 이사
3. 10월 19일 토요일 이사
보라색 글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연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 나는 일을 하느라 보라색 글씨에 대해서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집을 내놓은 지 2주가 지나가는데 아무 연락이 없자 조급한 마음에 공인중개사무소에 전화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드리려 했어요. 혹시 10월 3일에 집 볼 수 있을까요?”
“아, 네! 몇 시쯤 오시나요?”
“11시쯤 갈게요.”
다행이었다. 집을 보기만 한다면 언제나처럼 매매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했다. 난 결벽증으로 보일 만큼 깔끔하게 집을 정리했다. 어쩌면 결벽증일지도 모른다. 전남편은 이혼 후에 나의 기대치에 부응하느라 힘들었다고 말했었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은 결코 당연하거나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당연히 집은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어야지!’
“이쪽 화장실 벽면 타일 하나가 금가 있네요. 이거 보수 가능할까요?”
나는 이사 오시기 전에 완벽하게 처리하겠다고 했다. 개천절에 집을 보러 온 사람은 60대 대구 아주머니였는데 나와 비슷해 보여 깜짝 놀랐다. 오후 2시가 지난 무렵 부동산 소장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2천만 원 깎아주면 집을 사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물었다.
잠시 고민했다. 2천만 원을 내리면 이사비용뿐만 아니라 중개 수수료도 내지 못할 상황이었다. 협상이 필요할까? 요즘 같은 불경기에 더군다나 주택매매 거래가 거의 없는 시기에 거래가 이뤄지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년 전 이 집을 계약할 때의 일이 떠올랐다. 남편과 각자의 삶을 살아보자 하면서 빈털터리로 나왔다. 그러면서도 저렴한 신축 건물을 찾았다. 급매로 나온 집, 분양가 이하로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았던 이 집을 우연히 알게 되어 모든 대출을 끌어다 이 집을 샀다. 돈 한 푼 없었는데 다행히 직장이 그나마 괜찮아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좋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나올 때 빈털터리? 그랬다. 나는 아파트 보증금을 역시 가진 것 하나 없는 남편한테 모두 줬다. 그도 집을 구해야 하니까. 그때는 그나마 내가 더 나은 상황이라 판단했다.
“소장님, 2천만 원은 너무 많이 깎은 거 같고, 천만 원 정도로 여쭤봐 주시겠어요?”
천만 원 내린 가격으로 결정되었고, 늦은 밤 계약금 일부가 통장으로 들어왔다. 계약서는 12일 오후 1시에 공인중개사무소에서 작성하기로 했다. 다음날 오전 소장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매수인이 10월 20일에 이사 왔으면 하는데 그 전에 이사할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19일에 집을 비우겠다고 했다. 내가 가려고 하는 집은 이제 막 분양하고 있는 소형 타운하우스여서 언제든 입주가 가능했다.
이제 이사만 하면 끝이다. 나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가만... 19일? 핸드폰 캘린더 19일 ‘이사’, 보라색 진한 글씨! 섬뜩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핸드폰이 툭! 바닥에 떨어졌다. 뒤통수 한 대 된통 얻어맞은 것처럼 잠시 아득했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캘린더를 봤다.
12일에 대구 아주머니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그라운드 골프에 푹 빠져 제주도에 골프 치러 왔다가 아예 눌러앉으려 집을 산다 말했고, 소장님은 통상적인 매매계약은 1~2개월 잡는데 이번에는 특이하게 빨리 이루어졌다며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