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을 그만둔 이유_From the sky to the mat
나는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사랑했다.
공항으로 출근을 하고 업무를 마치면,
파리의 에펠탑, 에든버러의 해리포터,
뉴욕의 타임스퀘어, 남아공의 사파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받은 업무 스트레스는,
현지 공항의 이국적인 향기를 맡는 순간
새로운 감각이 살아나며 치유되곤 했다.
비행의 강도는 분명 높았지만,
외국 회사였기에 자율과 존중이 존재했다.
랜딩을 하고 같이 나가자는 상사의 제안에
피곤을 핑계로 거절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몰디브 비행이 끝나고 캡틴이
“다 같이 파티 가자!”라고 해도
“나는 오늘 그냥 쉬고 싶어. 졸려. ”
라고 대답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였다.
그곳은 그런 자유가 허용되는 세계였다.
휴가는 1년에 30일.
버튼 클릭 한 번이면 승인되었고,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쉴 때는 언제든지 회사에서 제공하는
ID 티켓으로 세금만 결제하면
전 세계를 여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만두었냐고?
호랑이는 홀로 사냥을 하며 육식을 하고,
얼룩말은 무리를 이루며 초식을 한다.
그건 영역에 맞는 본성일 뿐, 우열은 없다.
사람도 결국,
자신이 타고난 기질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고요한 사색을 즐기는 사람이다.
규칙적인 일상 속에서 숨을 고를 수 있고,
안정적인 공간에서, 감정을 차분히 정돈해야
비로소 나의 에너지가 흐른다는 걸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또한 나는 기존 구조를 따르기보다는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사람이며,
조직의 리듬보다는, 나만의 리듬에 맞춰 움직일 때
효율성이 올라간다.
그런 나에게 수년간의 비행은
너무 많은 소음과 변수,
그리고 불규칙함을 쌓아놓았다.
회사는 자유롭지만 엄격한 규율이 존재했으며,
그 구조 안에 나를 맞추는 건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다.
무엇보다 나의 타고난 체력은 강한 편이 아니었다.
무리를 반복할수록 회복은 더뎌졌고,
나를 빠르게 소모시켰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몸이 매일
경고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시차와 밤비행이 반복되며
불면증과 만성피로가 몸을 채웠다.
기내에서 반복되는 크고 작은 부상과 근육통.
기압차로 인한 귀 통증과 다리 부종.
건조한 공기로 유발되는 비염과 알레르기.
컨디션이 나쁠 땐
멀미 증상이 심해지기도 했다.
나에게 맞지 않는 삶을 오래 지속한 결과는
그렇게 몸으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열흘동안 케이프타운, 뮌헨, 마닐라, 서울을
비행할 때는 시차라는 개념조차 사라졌었다.
밤에 이륙했는데, 착륙하니 새벽.
호텔에서 자고 일어나니 또 저녁.
그리고 다시 비행.
며칠 동안 해를 못 본 적도 있었다.
사람이 왜 햇빛을 보며 살아야 하는지,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1월 1일, Happy New Year 세리머니를 하고
비행을 했는데 착륙하니 아직 12월 31일.
그렇게 새해를 두 번 맞이한 적도 있다.
뒤죽박죽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는 영화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전 세계 하늘과 땅을 오가며 쌓아온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자산이다.
각 나라의 사람들과 더 깊이 소통하고 싶어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공부한 시간 또한 값졌다.
공통어는 영어였지만,
한국어를 존중하며 나를 "언니"라고 불러주던
친구들이 있었고
나 또한 그들에게
"Jambo!" " hola!"라고 인사했다.
진짜 소통은 식탁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내어주는 음식을 함께 나누며
나는 문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리고 삶의 결에 대해 체화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나에게 조금은 맞지 않는 계절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지 않고는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 계절은 반드시 지나가야만 했던 시간이며,
그 시간을 지나야 만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내가 진짜 숨 쉴 수 있는 계절은,
이렇게 사유하고 정리하는 계절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 계절의 끝을 조용히 선언했고,
비로소 나답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Fly to the mat
여전히 비행을 떠나는 친구들을 응원하며,
그들의 여정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나는 내 방식대로,
내 안의 고요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다.
아침 해가 밝으면, 몸을 움직인다.
필라테스와 유산소로 몸을 데운다.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사업체를 운영하며,
휴식 시간엔 가족, 강아지와 함께 천천히 산책을 한다.
맨발로 흙을 밟는 어싱(Earthing)도 즐긴다.
해가 지면 조용히 하루를 정리하고, 기록한다.
라벤더 오일로 마사지를 한 뒤
고요히 명상을 하고 잠이 든다.
하늘로 날아오르던 불규칙한 시간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땅의 리듬에 나를 맞추며
천천히 뿌리내리고 있는 중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날아오르고,
누군가는 뿌리를 내린다.
삶엔 정답이 없다.
그저 각자의 결을 따라 살아가는 일,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나에게 맞는 계절을 따라
나만의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