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으로의 시작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올 때쯤 중학교에 변화가 생겼다. 원래 계시던 코치님이 대학교 코치로 가셨다. 오랜 기간 중앙중학교에서 지도를 해 주셨는데, 운동장에서 봤던 모습들이 있어서인지 함께한 시간이 짧았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좋은 일로 가시는만큼 웃는 모습으로 인사 드렸다. 새로운 코치님은 곧바로 오셨는데 강원도에서 오신 김재규 코치님이었다. 신기하게도 이 코치님을 따라 전학을 온 선수가 있었는데 이름은 주상혁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2살 많았으며, 마른 체형에 장난기가 많아 보였다. 본인은 재규 코치님에게만 달리기를 배우겠노라며 전국 어디든 따라간다고 했다. 육상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보였다. 코치님이 바뀌면서 내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감독님이 가을에 열리는 대회를 한번 준비해보면 어떠시냐고 하셨다. 부담가질 필요 없이 편한 마음으로 준비해서 달려보자고 하셨다. 이를 계기로 중학교에서 새벽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운동이 끝날 때면 코치님이 오토바이로 초등학교까지 태워다 주셨다. 한날은 담임 선생님께서 매일 아침에 태워다 주는 분이 삼촌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웃으며 코치님이라고 설명했다. 삼촌으로 보일 만큼 평소에도 자상하게 대해주셨다.
새벽 운동을 시작하면서 아침 식사는 육상부 숙소에서 해결했는데, 운동이 끝나고 형들이 씻는 동안 저학년들이 식사를 준비했다. 그날 양념이 된 단무지가 나왔는데 평소 먹어보지도 못한 익숙하지 않은 맛이라 반찬을 남겼다. 그걸 보고 상혁이형이 구박을 주며 꿀밤을 때렸다.
“아니 그냥 단무지잖아. 이걸 왜 남겨.”
반찬을 남긴 게 잘못이긴 하나 이게 꿀밤까지 맞을 일인가 싶은 억울한 마음에 울음을 터트렸다. 초등학생인 내가 울고 있으니 고학년 형들이 와서 상혁이형을 꾸짖기 시작했다. 괘씸한 마음에 일부러 더 울었다. 코치님까지 나서서 뭐라 할 때쯤 진정이 되었다. 그 광경을 보신 코치님은 용욱이도 보통 고집이 아닌 거 같다고 하셨다. 고집불통인 성격이 단점일 수 있으나 이 성격 덕분에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버티는 힘이 생긴 듯하다. 새벽 운동도 하고 새로운 초등학교에서 친구들과 놀다 보니 어느덧 대회가 다가왔다. 패배의 쓴맛을 본 그 운동장에 다시 달리러 간다. 기분이 묘하면서도 긴장됐다. 비록 많은 준비를 하지 못했지만 잘하고 싶었다. 이번 대회는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출전 선수가 많지 않았으며, 대부분 취미로 육상을 하는 친구들이었다. 나에게는 몸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는 기록회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운동장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기억하고 있는지 자연스레 몸을 풀기 시작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출발선에 섰다. 긴장감이 맴도는 이 장소에 다시 돌아왔다. 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예상했던 것보다 좋은 기록으로 마무리 했다. 그렇게 초등학생으로 달리는 마지막 대회가 끝났다.
12월, 겨울 방학을 앞두고 졸업여행을 갔다. 대구에 있는 학교는 대부분 경주로 많이 가는데 우리 학교는 신기하게도 서울로 갔다. 온 가족이 대구에서 지내기도 하고 서울에 갈 일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나와는 거리가 먼 곳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우리나라인데 마치 해외여행을 가는 기분이 들었다. 영락없는 대구 촌놈이었다. 출발일 아침, 학교 운동장에는 고속버스들이 줄지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친구들이랑 장난도 치고 한참을 잤는데도 도착하지 않았다. 모두가 지쳐서 투덜거릴 때쯤 높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착인가 싶었으나 기사님이 아직 고속도로 요금소도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진입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에서 보지 못했던 커다란 풍경들이 창밖을 지나갔다. 처음 마주한 서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했다. 훗날 여기서 살아볼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난생처음 롯데월드도 가보고, 광화문부터 종묘까지 서울의 명소들을 다니다 보니 2박 3일이 금방 지나갔다. 꿈같은 졸업여행이 끝나고 겨울 방학이 시작됐다. 일반 학생들에게 겨울 방학은 쉬는 기간이지만 육상 선수에게는 지옥의 동계 훈련 기간이다. 재규 코치님이 새벽 운동은 개인적으로 하고 오후 운동 시간에 맞추어 일주일 후에 시민운동장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이제는 예비 중학생이기 때문에 훈련량이 늘어난다. 높은 훈련량을 따라가려면 개인 운동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일주일 휴식 기간에도 쉬지 않고 훈련을 했다.
점심을 먹고 운동복을 챙겨 시민운동장으로 향했다. 중앙중학교도 소곡중학교와 같이 운동장 내에 쉴 수 있는 사무실이 있었다. 운동장에 사무실이 있다는 것은 곧 명문임을 말한다. 특히 중앙중학교는 인원수도 많아 운동장을 들어설 때면 남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사무실을 들어가니 낯이 익은 친구 한 명이 보였는데, 상곡초의 수금이었다. 서로가 놀라며 인사를 하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금이도 운동을 그만두려 했으나 중앙중에서 스카웃 제의가 와서 하게 되었다고 했다. 기현이와 준모는 운동을 그만두었고, 도혁이는 동산중학교로 갔다고 했다. 동산중이면 동혁이형이 있는 학교였다. 한 학교에 소년체전에서 메달을 딴 선수가 두명이나 갔다. 더군다나 그 학교 지도 선생님은 1500m 한국 신기록을 보유한 김순형 선생님이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또다시 소년체전 선발전 때처럼 쓴 고통을 맛볼 듯했다. 수금이와 함께 지지 않도록 우리 열심히 해보자고 결의를 다졌다. 이야기를 나누다 창밖을 보니 중앙중 형들이 이쪽을 향해 걸어 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군단 같았는데,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가슴 속에서 올라왔다. 동계 훈련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