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2

조계산 장군봉을 만나다

by 최빛글

늦은 가을, 겨울의 초입인데도 햇볕이 따뜻하고 포근 한 주말이어서 아내와 나는 조계산 장군봉을 오르기로 했다. 사실 최근 조계산을 다녀온 지인들의 추천도 있었고 인근에 살면서 가본 지가 20여 년가량 된 까닭에 궁금증이 생긴 터였다. 더 추워지기 전에 한 번 다녀오려고 마음먹었는데 마침 날씨가 좋아 잘 되었다 싶어 길을 나섰다. 선암사를 거쳐 대각암 쪽에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목적지에 가는 동안 차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가을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검은 흙빛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논두렁의 풀들은 갈색으로 채색되었다. 길가에 나무들은 저마다 잎을 떨구면서 겨울을 날 채비로 바빴고 숲은 울긋불긋 가는 가을을 배웅하고 있었다.

선암사로 가는 진입도로 양편엔 땡감 나무가 줄지어 서서 일 년 내내 열심히 키운 열매를 햇빛에 번들거리며 자랑하는 듯했다. 주렁주렁 열린 감들이 완전히 무르익어 동그랗고 탐스러운 빨간 꽃이 매달려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면서도 기꺼이 지나가는 새들의 충실한 먹잇감이 되어주며 의연히 서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자연은 사람들을 저절로 고개 숙이게 한다.

조계산은 광주 무등산, 영암 월출산과 함께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호남정맥이다. 한국불교의 양대 산맥인 송광사와 선암사를 품고 있는 산으로 유명하다. 서쪽 기슭에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인 승보사찰 송광사, 동쪽 기슭엔 태고종의 총본산인 선암사가 자리 잡고 있다. 불교적으로 그 역사와 의미가 깊은 명산이다.

우리는 사찰 입구의 주차장에서 조계산 도립공원 탐방로 노선도를 살펴본 후 선암사 승선교에 이르렀다. 이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 돌다리는 물에 비치면 완전한 원을 이루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또한, 다리 너머 강선루와 어우러지는 풍경은 가히 일품인 까닭에 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어서 연못과 큰 나무들이 있는 선각당을 거쳐 이정표를 따라가니 대각암이 나타났다. 아내와 나는 불상 앞에서 약간의 시주와 함께 일상에서 묻어 있던 먼지를 털어내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낙엽이 쌓여가는 산길을 채 얼마 오르지 않았을 즈음 나뭇가지로 작대기를 만들어 세워 그 위에 모자를 걸어 둔 것이 눈에 띄었다. 누군가 잃어버린 모자의 주인을 찾아주고자 배려한 것 같았다. 그 장면을 보면서 각박하게 변해가는 이 세상에 따뜻한 심성과 인간애가 엿보여 가슴이 찡하면서 달달하고 흐뭇해졌다. 어떤 이에 대한 ‘마음 씀씀이, 행동하는 양심’이 그것을 보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반성과 함께 밝은 미소를 전해주고 있었다.

우리도 서로 마주 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 마음이 포근하고 넉넉해지자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지고 흥이 났다.


장군봉으로 오르는 길은 별 지루함 없이 무르익은 경치를 구경할 수 있어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게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산 중턱쯤 다다랐을 때였다. 앞서가던 여자 한 분이 일행에 뒤처지며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길옆에 몸통이 잘려 밑둥치만 동그랗게 남아있는 참나무를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이테를 세는 걸까?’ 궁금해하며 다가가자 그분은 동작을 멈추고 일행을 뒤쫓아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자 아내가 같이 해보자고 하면서 함께 나무의 나이를 확인해 보니 오십이 훨씬 넘어있었다. 그 여자분이 일행에게 나이테 이야기를 하자 그중 한 분이 “나무도 격이 있어, 나이를 함부로 이야기하는 건 사생활침해야”라고 말했다.

그렇다! 자연을 이루고 있는 모든 만물은 나름의 역할이 있는 만큼 존중하고 보호받아야 한다. 지극히 그분 말에 동감하며 이렇게 ‘사려가 깊은 분들이 많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져 왔다.

한편으로는, 산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위협과 방해가 되어 베어진 나무 같긴 했지만, 자연과 산림 훼손이 심각한 요즈음 세태가 새삼 우려되었다. ‘녹색도시, 그린 환경, 청정에너지 개발’ 등 세계적으로 지구를 보전하기 위해 애쓴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연환경은 파괴되고 병들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후대들로부터 빌려 쓰고 있는 이 지구’를 잘 지켜 내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할 때인 것 같다.

비탈길을 조금 지나자 중간중간 통나무를 받쳐 만든 계단이 보였고 이후 밧줄로 이어진 난간대가 나타났다. 그 난간대 밧줄은 손으로 잡기에는 약간 곤란한 높이라서 등산용 지팡이나 지형지물을 잡는 것이 더 편할 수 있겠다고 여겨졌다.

소장군봉 이정표가 있는 짧은 바위 구간을 지나면 다시 높은 경사의 비탈길이 나왔다. 그 끝에는 향로암 터(행남절터)가 있었다. 선암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던 암자라고 한다. 현재는 터만 남아있는데 햇볕과 나무그늘이 잘 어우러지고 긴 의자를 설치해 놓아 쉬어 가기 좋은 자리였다.

절터를 지나 이어진 길은 가파르긴 하지만 그리 험하지는 않았다. 점점 장군봉이 가까워짐을 느꼈다. 경사로가 높은 탓에 이번에는 꽤 길게 이어진 난간대의 밧줄을 잡고 힘을 다해 발걸음을 옮길 때다. 낯익은 고향 선배 한 분과 마주쳤다. 그분은 산을 내려가던 중 반갑게 인사하며 쾌히 배낭을 열어서 가지고 온 바나나와 호떡을 간식으로 먹으라며 건네주었다. 내가 아는 그 선배는 평소 그렇게 살갑지 않았다. 한데 산에서 만나니 무척 친절하고 상냥한 것 같아 사람이 달라 보였다. 역시 ‘산은, 자연은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고, 겸손하게 하나 보다’.


산을 오르는 내내 주변이 잘 보이는 전망이 없었는데 정상 100m 전쯤에 멋진 조망터가 있어 멀리 주암호가 내려다보였다. 시원하게 가슴이 넓게 열렸다. 거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 조금 더 올라가자 정상 장군봉에 도착했다.

잔주름 없이 우람하게 솟아있고 좌우로 균형 있게 산줄기를 거느린 장군봉! 그 주변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넓게 퍼져 있고 한쪽에 의자가 잘 마련되어 있어 좋았다. 다만 정상에 있는 돌 주변으로 울창한 나무가 있어 시원하게 탁 트인 경관이 없어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고 올라온 곳 반대편으로 가니 산 아래 넓게 펼쳐진 경치를 볼 수 있었다. 늦가을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구름이 머무는 곳, 신선이 머무는 곳이 바로 여기겠거니 저절로 느껴졌다.

산 정상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장군봉 표석에는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부부도 옆 사람에게 부탁해 추억의 한 장을 남기고, 산 정상의 산들바람으로 약간의 추위가 찾아오자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울퉁불퉁 여러 가지 모양의 돌들이 많이 널려있어 단순한 내리막길이 아니었다. 올라갈 때 상당히 가팔랐으니 내려가는 길도 당연히 경사가 심하겠지만 천천히 걷는데도 무릎에 상당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무릎 보호대와 등산용 지팡이가 필요함을 실감했다. 내려오면서 등산길을 더듬어 보니 울창한 숲이 군데군데 햇빛을 열어주고 지붕 없는 숲 동굴 길을 만들어 주고 있는 듯 보였다. 아내와 나는 깨끗하고 좋은 공기와 홍수 예방은 물론, 자연 생태계를 지키며 ’ 사람들의 터전이 되어주고 있는 숲‘을 향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왕복 4시간여의 오늘 산행은 ’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아끼는 마음을 단순히 생각만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하나씩 실천해 보자고 자신을 독려해 보았다. 혼자 살 수 없는 세상, ’함께 살아가는 세상‘임을 다시 한번 가슴 한 자락에 새기게 된 하루였다.


<남기고 싶은 말>

⋅자연은 서두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이룬다. (라우쩌)

⋅자연과 가까워질수록 당신은 더 나다워진다.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자연은 가장 큰 치유사이자 가장 신비한 예술가다.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무료로 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대가로 그에게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조지 워싱턴 캐비)


동그란 모양은 우주와 닮아서 아이들의 순수하고 맑은 마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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