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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토파일럿 Jan 17. 2023

나는 호구다.

초심자의 행운???

조종사에게 별도의 휴일은 없다. 

매월 마지막 주 정도에 다음 달 비행스케줄이 나오고 비행이 없는 날이 휴일이 된다. 

개인적인 용무로 꼭 쉬어야 되는 날을 미리 하루 이틀 정도 신청하면 대체로 그날은 비행 없는 날로 지정된다. 

월말에 목 빠지게 기다리던 다음 달 스케줄이 나오면, 기장이 된 지금은 가야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비행횟수는 얼마나 되는지 먼저 확인한다. 


부기장 때는?


목적지도 중요하지만 대체로 기장이 누구인지를 먼저 살핀다. 


공항도 매번 가는 쉬운 공항과 한 번도 가보지 않거나 오랜만에 가야해서 접근절차나 관제사와의 통화내용을 미리 연구해야 하는 난이도 높은 공항이 있지만, 그 어떤 어려운 공항도 일명 ‘블랙’이라 불리우는 인성이 안타까운 기장과 비행하는 스트레스에 비할 바 아니다. 

비행자료 차트


2박짜리 비행에 어머니와 막내딸이 동행했을 때 어머니께는 화장품, 딸에게는 초컬릿을 면세점에서 사주시고는 체류지 호텔방이 좁을테니 본인방과 바꾸자며 스위트룸을 내주셨던 천사기장님도 있었다. 

이처럼 대부분이 관대하고 좋으신 반면 우리 집단에도 5% 정도 진상이 존재한다. 


민항에 입사해서 고된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갓 부기장이 되었을 때 동기들에서 누구나 가고싶어 하던 목적지는 단연 ‘발리’였다. 

아름답고 물가도 저렴한 대표적인 휴양지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체류가 24시간 인데 반해, 주 2회만 취항했기 때문에 한 번 가면 3박 또는 4박을 쉬다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학수고대 하며 스케줄을 기다려봐도 그런 좋은 일정은 고참 부기장에게만 나올 뿐 나 같은 신참에겐 어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기장 단톡방에 사정이 생겨 코앞에 닥친 4박짜리 발리스케줄과 다른 비행과 교환하고 싶다는 고참 부기장의 톡이 올라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봤는데 50명도 넘는 단톡방 인원이 대부분 글을 확인했음에도 답글을 다는 사람이 없었다. 


“기장님! 제가 가도 될까요?”
“당연하죠.^^”


스케줄러에게 전화해서 바로 비행을 바꿨다.

얼른 애들 현장학습을 신청하고 여행계획을 짰다. 직원티켓은 저렴했고, 호텔도 공짜에, 체류기간 내내 돈까지 주는 이런 호사가 없었다. 

썬베드에 누워 모히또 한잔을 시켜놓고 서핑을 배워볼까?


꿈에 그리던 그 발리였다.      



비행당일 기장님과 웃으며 악수를 하고 자기소개를 마치자 기장님이 4박이나 되는데 계획은 잘 짜왔냐고 물었다. 

“**비치, XX사원을 다녀올 예정입니다. 애들도 기대가 크더라구요.”

애들이란 말을 듣자마자 기장님 눈이 가늘어지며 낯빛이 흐려졌다. 

머쓱했지만 조용한 브리핑이 이어졌다. 




이륙은 내가 했다. 

착륙에 비해 이륙은 그리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이륙 후 자동비행 모드를 켜고 필요한 점검을 마치고 나서 안정되었다 싶었는데.. 난데없이,


 “너! 머하는 자식이야!! 비행도 얼마 안한 게 겉멋만 들어가지고...”

쏘아대는 지적을 한참이나 듣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만 피트도 안됐는데 방향을 조절하는 러더에서 발을 떼고 바닥에 내려놓았다는 이유였다. 

자동비행 모드로 바꾸고 나서는 수동으로 러더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매뉴얼 어디에도 발을 대고 있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지만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부기장 주제에 기장을 4일 내내 혼자 내버려둬서 기분이 상한 분풀이 란걸 금방 눈치챘다.


객실승무원은 체류 없이 바로 돌아가는 비행이라 마중나온 호텔 픽업차량은 7인승 SUV였다.

발리공항에서 처음 마주한 우리 가족 앞에서도 궁시렁은 계속됐다. 

차도 작은데 뭔 짐이 이렇게 많냐는 둥, 애들 공부 안시키고 이렇게 놀려도 되냐는 둥, 호텔로 가는 내내 개풀 뜯어먹는 소리만 중얼거렸다.



발리에서 가족들과 보낸 시간은 달콤했지만 복귀편 비행에서도 기장님의 갈굼은 계속됐다. 

6시간이 넘는 비행동안 자기가 알고있는 지식을 총동원한 질문공세에 기내 수납함에 꽂힌 매뉴얼을 펼쳐 대답하길 수십 차례. 

졸음과 스트레스로 초죽음이 되어 인천에 착륙했다. 

그것도 모자라 사무실에 복귀해서도 담당보직자 면전에서 이런 초짜와 비행하다 비상상황이라도 나면 어쩔 거냐며 고래고래 성을 내가며 무안을 줬다. 


경험도 없고 ‘블랙’에 대한 정보도 없던 내게 초심자의 행운은 없었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먹어 봐야 알 정도의 초심자라면 행운을 기대하지 말고 공부해서 수준을 높이거나 실력 있는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손실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휴게소에서 인상 좋은 아저씨가 기름이 떨어졌는데 현금이나 카드가 없다면서 납품용 홍삼세트를 70%나 저렴하게 내밀거나, 최근에 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강남 중개법인에 취업한 사촌동생이 고위층 내부정보라며 소개하는 땅이 택지개발지구 예정지라는 말에 혹한다면 당신이 호구가 될 확률은 거의 100%다.     



늦게라도 타짜들 노름에 작업당한 것을 알게 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고 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호구임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매번 당하며 살아간다. 


공무원이나 한길만 고집해온 소위 ‘전문직’들이 타짜의 대표적인 먹잇감이 된다. 


제 잘난 맛에 다른 분야는 관심조차 두지 않아 세상물정 모르는 전형적인 호구이기 때문이다. 

정년이 되는 날부터 비행을 그만두어야 하는 조종사가 전문직인지는 모르겠고, 

다만 누군가 알려주기 전까지 나 역시 호구였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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