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부지! 저 잘 컷어요.”
경매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료 속에서 디테일을 찾는 과정이다.
부동산 종합증명서나 등기부만 봐도 그 집의 대략적인 흥망성쇠 파악이 가능하다. 어떤 이는 가격이 20억이 넘는 아파트를 대출하나 없이 가지고 있는 자산가인 반면 어떤 사람은 몇 백의 카드빚을 돌려막기 하다 결국 부모님을 모신 땅까지 경매로 날리기도 한다.
매번 다른 사람의 등기부만 들춰보다가 문득 우리 집은? 하고 궁금해 졌다.
물론 내 이름으로 된 등기부야 내가 모를 리 없지만 아버지 역시 사업이 잘 못 돼서 경매로 전 재산을 날렸기에 쓸데없이 특기를 살려봤다.
안성군 일죽면 **리
할아버지께 상속받은 땅에 4년 후 공장을 지어 지목이 ‘장’으로 바뀌었고, 딱 3년 만에 소유권이 넘어갔다. 경매진행 기간을 고려하면 아버지가 대표이사 직함을 갖고 있었던 기간은 채 1년 남짓일 것이다.
남들 것과는 다르게 연도와 숫자가 가슴을 쿡쿡 찌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이며, 아버지가 중국으로 도피길에 오른 것 까지…….
아버지가 지은 세 동의 공장건물은 가설건축물 까지 더해 제법 위용을 갖추고 있고 작은아빠가 하던 젖소가 2008년 까지는 보이는 걸로 보아 그때 쯤 육우로 바꾸셨구나.
할아버지가 계신 종중산소 가는 길은 농로는 명절 때 마다 길이 좁아 불편했는데 곧 확장까지 되네..
슬픈데 재밌다.
내가 6살 때 까지 살던 고향집으로 눈을 돌렸다.
새로 지어진 2층 양옥집 대신 대청마루가 있던 한옥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조부모님과 함께 살던 그 시절 사진은 해상도가 좋지 않아 지붕과 마당조차 식별이 어려웠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것도 구분되지 않는 그 사진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40년간 잊고 살았던 추억이 봇물 터지듯 떠오르며 눈가가 촉촉해 졌다.
참내 맨날 봐오던 항공사진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지니 웬 청승이람.
대청마루 기다란 형광등 밑에 날아든 땅강아지 배를 간질이던 부드러운 감촉,
뒤뜰 그늘에 제멋대로 자라나 송이조차 몇 개 달리지 않았던 포도 알의 새콤함.
재래식 변소 가는 걸 무서워했던 내가 외양간 옆 마당켠에 아침똥을 싸 놓으면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모삽으로 츠욱- 퍼서 거름자리에 버리셨다.
수돗가 대형다라에는 삼촌들이 잡아놓은 미꾸라지 몇 마리가 제 집인양 살고 있었고, 광 옆에 대충 걸려 있던 셋째 삼촌의 검은색 스케이트는 어느 겨울 날 내 썰매의 날이 되어 있었다.
굵은 철사를 감아온 동무들의 썰매보다 단연 날랬던 건 두말이 필요 없다.
‘나는 장기기억력이 떨어지나봐. 남들은 어릴 적 일들이 곧잘 생각난다던데 난 유난히 기억이 없네…….’
라고 생각하며 마흔이 넘게 살아왔는데...
이제야 깨달았다. 원래부터 거기 있었는데 내가 한 번도 들춰보려 하지 않았던걸.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하수구 맨홀 뚜껑도 아닌데 꼭꼭 잠긴 기억은 의도치 않은 계기로 쉽게 열렸다.
여섯 살 까지 조부모님 손으로 기른 정 때문인지 방학이며 명절이며 시골에 갈 때마다 부모님 몰래, 그리고 15명도 넘는 다른 사촌들 몰래 꽤나 큰돈을 손에 쥐어 주셨다.
장성한 8남매 앞에서 언제나 꼿꼿하게 호통을 치던 할아버지가 굽실거리는 모습을 본건 사관학교 1학년 어버이날 행사 때였다. 우리 아버지보다도 10살도 더 어린 중대장을 처음 마주한 자리에서
“아이고. 중대장님 우리 00이 잘 부탁드립니다…….”
라며 허리를 90도로 숙인 채 구간 재생하듯 같은 말만 반복하셨다.
얼마 후 위독하시다는 말을 듣고 찾아뵌 할아버지는 배에 복수가 가득 찬 채로 아무 말씀 없이 병상에 누워계셨다.
1997.04.12. 동기생 누군가 큰 잘못을 저질러 단체기합이 예정되었던 그날 난 연병장에 집합하는 대신 부모님의 전화를 받고 경조휴가를 나갔다.
1998.04.12. 사관학교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애지중지 키운 손자 기합 빼주려고 고통스러운 숨을 며칠씩이나 더 붙들고 계셨던 거에여?
나 사람 되라고 꼭 집어 1년이 되는 날 성깔이 좀 있는 아가씨로 옆자리에 꽂아 주신 거에여?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너무 하셨어요... 할아부지
나중에 꼭 여쭤보고 싶은 두 가지 질문이다.
독서노트를 쓰기 시작하고 여태 읽은 책은 23.01.25 현재 437권이다.
책만 읽었을 때는 그저 독서는 지식을 머리에 넣는 과정이고, 글쓰기는 머릿속 내용을 인출하는 과정인 줄 알았다.
작년 연말부터 시작한 몇 꼭지의 글쓰기와 오늘 이글을 통해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서 독서와는 차원이 다른 성찰과 포근함을 얻은 듯하다.
구들장이 뜨거웠던 한옥, 대청마루는 없어지고 변소와 외양간 대신 창고가 들어섰지만 할머니가 빨래하던 그 수돗가엔 작은엄마가 대신 서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