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만의 친구전화
고교시절 절친 이었던 녀석의 목소리를 직접들은 건 20년 만이었다.
동탄이 논바닥이던 시절, 화성에서 수원으로 진학해서 고교기숙사에서 생활했던 그 친구는 일명 ‘유학생’중 한명 이었다.
같이 몰려다니던 우리 삼총사중 제일 성적이 좋았으며, 손에 땀이 많아서 흰색 가재손수건을 늘상 손에 쥐고 있던 녀석은 회계사를 꿈꿨다.
졸업 후 고시원에서 회계사 시험 준비를 하느라 사회생활 속에서 저마다의 위치를 뽐내기 바빴던 고등학교 반모임에도 두문불출 하던 친구는 내 결혼 즈음 연락이 끊겼다.
무관심으로 일관하기엔 너무도 친했기에 ‘건설사에 입사했다.’, ‘외국인과 결혼했다.’던 소식을 건너건너 알게 되었고, 건네받은 카톡프로필 사진엔 토끼같은 딸과 귀염둥이 아들이 방긋 웃고 있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1년 가을 ‘드르르륵’ 진동 소리를 내는 폰화면엔 익숙하지만 잊고 지낸 이름 세글자가 찍혀있었다.
20년 만에 듣는 목소리는 활기찼다.
가족의 안부와 사는 곳 등 서론부분을 간단하게 물어보고 녀석이 내민 본론은 돈 얘기였다.
중견 건설사 팀장 경력을 바탕으로 시행사를 차렸고 자본금은 수억대지만 곧 100억이상의 이익을 예상한다. 다른 사업으로 떼돈을 번 후배가 사업성이 좋다고 판단해서 동업을 하고 있고, 지금 초기자금이 모자라서 투자자를 모집할 뿐 늦으면 기회를 놓친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다며, 화천대유, 정비사업, 가로주택사업 등 혹할만한 단어를 대화 중간 중간 끼워넣었다.
최종적으로 5천만원 정도만 투자하면 곧 몇 억으로 돌려주겠다고 했다.
확신은 없었지만 감이 왔다.
수없이 읽었던 경매소설<춘배>에 나오는 마귀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무자르듯 단칼에 거절을 뱉어낼 수 없어, 사무실을 방문해서 얼굴보고 투자판단을 하자고 했다.
동탄 랜드마크에 새로 개업한 사무실 주소를 알려달라는 내말에 녀석은 주소대신 급하다고 했다.
“얼마나 급한데?”
“내일까지…….”
당장은 힘들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기장이 수중에 돈 오천도 없냐며 말을 툭툭 던졌다.
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서너달뒤 다시 걸려온 목소리엔 처음의 활기대신 초조함이 묻어났다.
필요한 돈은 오천에서 ‘다만 얼마라도…….’로 줄어있었다.
공매로 투자한 내땅이 도시개발사업에 편입되면서 시행사 지주작업담당은 사전연락도 없이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고 잔금시기도 정해진 바 없는 토지매매 계약서를 내밀었다.
본의 아니게 알박기 비스무리하게 되버린 토지의 매도협상에서 시행사 대표는 높아진 PF 대출로 회사가 존폐기로에 있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난 리스크를 짊어지기 싫어 바로 환지부지정 후 현금청산을 받기로 했다.
건실했던 건설사도 최근 급작스런 금리폭등과 주택경기침체로 전투기 만난 폭격기처럼 속절없이 추락하고 있다.
며칠 전 점심시간에 다시 전화가 왔다.
밥은 먹었냐는 내 질문에 그럴 정신이 없다고 했다.
결국은 돈 문제였지만 이번 용처는 형사합의금이었다.
“사건은 검찰로 넘어갔고, 집행유예 받으려면 합의해야 된데……. 합의 못하면 실형살수도 있데…….“
수화기 너머로 가느다란 ‘끄윽 끄윽’ 소리가 들렸다.
그의 손엔 아직도 초조함을 닦아낼 가재손수건이 쥐어져 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