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점 4
[희랍어 시간]은 시력을 잃는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의 이야기다. 서로 부족한 점을 보듬어 주고 연대하며 극복해 가는 이야기이다. 희랍어 강사인 시력을 잃고 있는 남자는 독일에서 살 때 귀가 들리지 않는 인도인 여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으나 여자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로 오라는 이기적인 행동을 해 여자친구를 떠나보낸 적이 있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언어에 집착하는 이유는 오히려 그들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라 했다. 우리는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며 개인의 고유성을 끊임없이 표현하고자 한다. 하지만 언어의 층위는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다. 간결하고 명징하며 정확한 언어로 내가 원하는 바를 표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희랍어는 특성상 간결하게 표현이 가능해 문장의 어순이 중요하지 않은 언어라고 한다. 이러한 특성을 봤을 때, 작가는 이 소설 속에서 언어를 갈고닦아도 내가 원하는 바를 100 퍼센트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를 최대한 노력해 넘어서고 싶어 하는 욕망을 담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조차도 내가 의도한 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데 내 언어가 타인에게 맞닿았을 때, 타인이 내 의도를 오해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그래서 작가가 희랍어 시간의 첫 문장을 보르헤스의 말로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 때로는 오히려 언어, 말보다는 비언어적인 표현인 얼굴 표정, 행동, 몸짓 등에서 화자가 말하고자 한 의도가 더 잘 드러나기도 한다. 한 가지 이 소설에서 아쉬운 점은 결국 연대가 이성 간의 사랑이란 점으로 표현되는 점, 다소 순진한 결말. 마치 웨딩 피치에서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이런 느낌이랄까. 낙천적이고 긍정적이고 미래가 아름다운 결말도 좋지만 나는 좀 더 현실적이고 부정적이더라도 현실을 직시하는 결말이 좋다. 현실을 직시할수록 오히려 가야 할 방향이 명확해지고 부족한 점을 개선하고자 노력해서 결국에는 긍정적인 결말을 기대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소설 속 언어 외에 또 다른 주제라고 생각한 연대란 뭔가. 연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연대를 통해 극복한다는 게 사실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소설을 읽다가 느낀 것은 연대라는 게 슬픔의 바닷속에서 슬픔의 항아리를 함께 채우는 행동인 것 같다. 어떤 힘든 시련이나 아픔이 찾아왔을 때,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풍덩 빠져서 충분히 파도를 몸으로 맞는 일이다. 파도를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없고 파도를 맞아야 오히려 빠른 회복이 가능하다. 때로는 파도를 대면하는 것보다 파도를 피하는 일이 더 힘들다. 즉, 충분히 괴롭고 슬퍼해야 아픔에서 탈출할 수 있다. 이처럼 나는 슬픔의 바닷속에 특정 슬픔을 담는 항아리, 아주 큰 항아리가 있다 생각한다. 눈물과 땀으로 이 항아리를 끝까지 채워야 그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연대라는 것은 함께 울어주고 함께 파도를 맞아주면서 이 항아리가 가득 차서 넘치게 해주는 것이고, 그래서 보다 빨리 함께 슬픔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게다가 항아리가 가득 차서 넘치면 가득 찬 항아리를 치우려는 행동을 하는 데 이는 더 이상의 슬픔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책을 찾는 행위라 생각한다.
이 책에 있는 한강 작가의 시 중에서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이라는 시가 제일 좋았다. 작가는 늦은 저녁에 밥을 지으면서 문득 뭔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느낀다. 밥이 다 지어지면 다시 생쌀로 돌아갈 수 없고, 영원한 건 없다는 말만이 영원하니 영원히 지나가버린 순간들이 수없이 많다. 화학에서 말하는 처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비가역적 반응인 순간들! 대학교 동창을 만났을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월급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는 미묘한 계층적인 긴장감을 느끼는 순간이나, 세속적 질문들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허공에 떠다니는 대화 속, 밑에 자리 잡은 감정들이 실체로 드러나게 되니까 이러한 질문들을 최대한 피하게 되는 순간들.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될 수 없구나 느끼게 되는 막연한 서운함과 안타까움, 열등감, 질투, 부러움, 슬픔, 그래도 오랜만에 동창을 봤기에 약간의 반가움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
한강 작가가 [사자왕의 모험]을 재밌게 읽었다는 산문을 봤을 때는 반가웠다. 나도 초등학교 때 [사자왕의 모험]을 재밌게 읽었는데 어린이 책인데 죽음과 상실을 다뤄서 기억에 유독 남은 책이었다. 어린 날의 나는 왜 이렇게 책에 과몰입했나 생각해 보면 책이 유일하게 현실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주는 존재라 그랬던 것 같다. 책 속의 불우한 주인공들이 모험을 떠나고 여행을 떠나고 공주가 되고 왕자가 되는 이야기가 좋았다. 처음에는 왕이 되는 게 부러워서 그랬나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부러워했던 것은 ‘떠나는 것’이었다. 현실을 떠나고 싶었나 보다. 사실상 학교에도 그럭저럭 다니긴 했으나 학교에 완벽하게 적응한 편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한다고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떠나기 위한 매개체로 삼았던 것 같다. 특히 영어. 해외라는 새로운 환경이 미지의 세계 같았고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모험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언어로 나를 완벽히 표현하는 것도, 타인이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모두 다 불가능하다. 물론 연대로 함께 무언가를 극복해 나가는 것은 가능하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인생은 혼자이지 않은가. 그래서 부유하며 살다가도 나도 모르게 어딘가에 뿌리내리고 정착하고 살고 싶었다. 그러나 살다 보니 뿌리라는 것은 허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뿌리는 나한테 있다. 내가 곧 뿌리고 내 정체성을 바깥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내가 정의하는 나'가 곧 내가 되고 내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한국인, 미국인 등 어느 그룹에 속한다고 해서 나를 정의 내릴 수 있게 되는 게 아니다. 물론 정체성은 매년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바뀌는 나의 역사도 곧 내 정체성이 된다. 결국은 내가 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