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가는 것들이 남기는 것에 대하여
겨울, 제사가 많은 계절이다.
장을 보고 음식을 한다.
올해도 남편의 할머니, 내 시할머니의 기일을 맞이한다.
누구를 위한 음식인지 애매하지만,
산 자손과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음식을 하고 상을 차린다.
태어나 살다가 자손을 낳고 돌아가는 삶!
돌아가는 곳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돌아간다고 한다.
온 곳으로 간다고 한다.
온 곳은 어디일까?
사람의 뱃속인지, 세포 어디쯤인지, 공기 속인지 알 수 없다.
인간이 먹고, 마시고, 숨 쉬는 모든 것이 자연에서 오니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맞는 듯도 하다.
순리에 따라 자연스레 땅으로 스며들고,
공기로 흩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이 다한 인간은
소멸이란 무엇인가?
어려운 이야기다.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모든 생명이 생을 다하면 표면적으로는 소멸한다.
존재는 세상에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소멸했다고 말하는 게 맞을까?
일정 시기가 되면 잎도, 꽃도, 열매도 성장을 멈추고 사그라들다 떨어진다.
혹여 나무가 죽어도 그 씨앗들은 다른 자리에서 순환을 이어간다.
이 모든 것을 소멸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전의 존재가 소멸했으니, 땅으로 흩어진 존재가 다시 생명을 피운다 해도
그것은 소멸이 맞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 또한 나무와 같다.
때가 되면 나무의 꽃이 지고 잎과 열매가 떨어지듯이,
인간 또한 삶을 영위하다 생이 다하면 사그라들다가 사라진다.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분명 소멸한 듯 보인다.
하지만, 나무가 생이 다한 꽃과 잎, 열매를 자양분 삼아 생을 이어가듯
그 흔적들은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까?
그들은 진정 소멸한 것이 맞을까?
사실, 존재가 완전히 소멸했다기에는 애매하다.
조상들의 DNA를 이어받은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자식을 낳고 또 자식을 낳으니 말이다.
비슷한 생김새의 아이들과 남편을 바라본다.
성격과 취향까지 닮은 이들이 나란히 줄 맞춰 쉬고 있다.
조상을 기리기 위한 시간은 잠시 유예된다.
밤이 깊어지고 돌아간 조상을 기리기 위한 적절한 때가 온다.
때에 맞춰 유예를 증명하는 증거들이 하나둘 모인다.
스스로 존재의 유예를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들의 전통에 따라, 그들의 방식으로 그들의 취향을 반영해 상을 차릴 뿐!
수순에 따라 제사상을 차리고 돌아가신 이를 기리다 음식을 나눈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가 즐겨드시던 취향대로 자손들이 맛있게 음식을 먹는다.
기억이 자손에게 남았고, 식성이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함께 공유한 경험의 몫도 있을 것이다.
제사상의 음식은 조상을 위해 차려졌지만 자손들이 모여 그 음식을 나눈다.
소멸이 유예된 증거를 지닌 이들이,
비슷한 이목구비와 체형으로 상 앞에 둘러앉은 모습을 바라본다.
할머니를 닮은 식성과 아버지를 닮은 입맛으로 머리를 맞대고,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를 나누며 기억도 더듬는다.
그사이 섞인 우리의 유예들도 한자리 거들고, 제사상 앞에 네 개의 다른 성씨들이 모여 음식을 나눈다.
또 그들의 젊거나 어린 자손들도 한 숟가락씩 거들고 있다.
머리를 맞대고 이별에 오고 간 흔적을 남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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