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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품위 있는 삶

그때 지키고 싶던 품위가 미래에도 중요합니까?

by CE Lee

친구의 소개로 [품위 있는 삶]이라는 책을 만났다.

그중 단편 소설 [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은 날카롭게 나를 찔렀다.


주인공 나윤승 할머니는, 본인의 젊은 시절 치매로 완전히 변해버린 아버지를 견디기 힘들어하다, 결국 아버지가 사고로 심하게 다치자 안락사에 동의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 과정을 겪으며 자신은 인간다운 모습으로 품위를 잃지 않고 살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고가이지만 치매 판정을 받으면 안락사를 하는 특약 조건이 포함된 보험 상품에 가입한다.

할머니는 결국 치매에 걸리게 된다. 본인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며, 결혼을 한 적이 없어 자식을 두지 않았음에도, 보험 상품의 서비스 중 하나로 아들과 손주 역할을 해주는 직원을 자신의 아들과 손주로 착각할 정도의 상태가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늙는 것이 너무 비참하며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저에게 닥쳐오니 다른 생각이 듭디다.
이렇게 아무 일 하지 않고 조용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느슨한 계획 아래 어제와 같은 일상이 흘러가고,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으므로 더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잠에서 깨면 팔을 뻗어 커튼을 열고,
혼자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걸어가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실 수 있는 힘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해가 뜨면 세상은 밝아지고, 산의 푸름은 여전하며,
공기는 숨을 쉴 수 있을 만큼 맑습니다.
이런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놀라워요.” 12p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비교적 젊은 사람들은 나윤승 할머니가 젊었을 때 가졌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낄 것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은 비참하고 슬픈 일이라고. 우리 모두가 반드시 갈 길이라고는 하지만 가보지 못한 그 길이, 멀리 서는 가시밭길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 내가 발을 딛는 순간이 되면 꽃길처럼 느껴질지 감히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손주 역할 업무를 맡았던 직원은 안락사 관련 특약 조건을 알고 있어, 차마 회사에 할머니의 치매 사실을 알리지 못한다. 가끔 이상한 언행을 하지만, 여전히 살아 숨 쉬며 행복해하는 할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 꼭 끝까지 사셔야 해요.
몸이 아파도, 정신이 아파도 그것도 할머니니까 포기하지 마세요.” 34p


삶의 여러 조각들이 이상하게 느껴짐에도 끝내 본인의 치매 사실은 인지하지 못하는 나윤승 할머니지만,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인다. 정신이 있을 때라면 품위를 잃은 모습이라 치부하겠지만 할머니는 사소한 것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며 끝까지 살아 내고 싶은 마음을 고백한다.

“나는 그냥 태어난 나와, 죽을 나,
맞닿은 두 지점 사이에 접혀 들어가 삭제된 시간 속에 있는 거야.
과거의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미래에 대해 무슨 약속을 했건 그건 잘 모르고 한 개소리야.
내가 살아보지도 않은 시간을 어떻게 알고 그랬겠어.
무서웠던 거지.” 45p



사실 다음 주 토요일은 할머니 생신이다. 병원 방문을 앞두고 친정 식구들과 일정을 조정했으나 시간이 맞질 않았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이번 만남에는 동행하지 못하고 다시 일정을 맞춰 보기로 했다.

만남이 연기되자 마음이 이상하게도 조금 가벼워졌다.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면서 할머니를 만나러 갈 생각을 하면 왜 이런 복잡한 심정이 되는 걸까. 아흔이 훌쩍 넘으신 할머니가 요양 병원 생활을 하신 지 벌써 7년이 넘었고 처음에는 정기적으로 뵐 수 있었지만 코로나가 대유행하고 그 기간이 길어지며 그나마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런 상황을 조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요양 병원을 다녀오고 나면 며칠 동안 꼬리를 무는 여러 갈래의 생각들에 마음이 불편해져서였을지 모르겠다.

할머니를 비롯하여 그곳에 누워 계신 분들의 대부분은 논리적인 사고나 일상적인 소통조차 어려우셨다. 그렇지 않을 경우 거동이 어려워 누워 계신 분들이 많으셔서, 각 병실마다 지키고 있는 보호사 분들의 도움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었다. 용변을 보거나 목욕을 할 때도 보호사 분들이 절대적으로 함께 있어야 했다.


누구나 나이 들어감을 피하지 못하는데, 나의 끝은 과연 이 분들과 다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병원 문을 나설 때면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곤 했다. 아니, 나나 남편 이전에 양가 부모님의 노후에 대한 두려움이 내 마음을 무섭게 짓눌렀었다. 인간다운 모습으로 품위를 잃지 않고 말년을 보내고 싶다, 부모님의 품위를 지켜드리고 싶은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었고 그런 마음을 품고 나면 참 슬펐다.

그리고 감히 그분들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니라고 함부로 판단했었다.


그랬던 나의 감정들은 이 책을 만나며 위안을 얻었고 다시 한번 마음 깊이 다짐하게 되었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리라고.

그분들을 향해 가졌던 건방진 동정심과 측은지심의 감정을 없었던 일처럼 되돌리고 싶어졌다. 또 우리에게, 부모님들께 다가올 어떤 날들도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 맞게 즐길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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