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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문 Jun 21. 2024

암 이야기 1

나는 드라마 여주가 아닌데...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친구 따라 검진했는데...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속에서만 듣는 병인 줄 알았어요.

특별히 건강관리를 하지 않거나 죽을 만큼 스트레스를 받거나

그럴 때 생기는 병인 줄 알았습니다.


평범한 질병이었어요. 감기처럼.

같은 공간에 있어도 어떤 이는 감기에 걸리고 어떤 이는 멀쩡하듯.

원인도 이유도 알 수 없는, 흔하디 흔한 병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설명으로는

유관이 노화가 되어 찌꺼기가 쌓여서 생긴 노폐물이 원인이라는데.

나이가 들어서 흰머리가 나듯이,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 중 찾아오는 불청객 같은 걸까요?




조직 세포 검사를 처음 한 것도 아니고.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미세석회 모양이 지난번과 다르다는 건 알았지만, 나한테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날까 싶었던 거죠. 면역 반응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병원 전화를 받고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요.


검사 결과를 듣던 날, 접수처 위 서류 봉투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제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구나.

큰 병원으로 가야 하는 걸까.

희망 회로를 아무리 돌려도 시술이 가능하면 전원이 필요하진 않을 텐데.

그래도 전암단계라서 수술이 필요한 경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오답을 정답이라 우기고 싶었습니다.


진단명은 관내제자리암, 상피내암이라고도 하죠.

0 기암, 침윤성 암이 아니니 절제술만 잘 받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동안 열심히 추적 관찰을 했으니 초기에 발견한 것이고,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선생님의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믿기 싫었겠죠.


내가 왜 암이냐 하늘이 원망스럽지도 않았고,

하필 왜 나한테... 눈물이 나지도 않았어요.

그냥, 아이들과 엄마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혼자 수술하고 회복하고 싶었어요.

가족들이 얼마나 놀라고 속상해할까 생각하니 , 내가 암이라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선생님 소개로 대학 병원 진료를 받았습니다.

대기 중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암인가 봐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걸리는 병인데, 왜 나는 한 번도 암에 걸릴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했을까요.


가장 빠른 날짜로 수술을 가예약했어요. 한 달 뒤입니다. 그만큼 수술이 많이 밀려 있다고.

아이는 담담하게 잘 받아들여주었고, 엄마도 그러셨어요.

엄마께 제일 죄송한 마음입니다. 효도는 못할 망정 이런 일까지 겪으시게 하다니.


0 기암은 침윤성 암이 아니라 전이되지 않으니 위험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뿌리를 내리고 전이되는 침윤성 암에 비해 널리 퍼져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해요. 유관 내에서 둥둥 떠다닌다고 합니다. 쉽게 퍼질 수 있다는 뜻이지요. 운이 좋아서 부분 절제를 한다면 남아 있는 조직에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할 수도 긴 시간 약을 먹어야 할 수 있어요. 운이 나쁘면 전절제를 할 수도 있습니다.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의 몸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좀 나을까요?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이니 또 다른 공포가 찾아옵니다.

암보다 무섭다는 치료비입니다.

다행히 작년에 부담보 없이 가입해 둔 실비 보험이 있었고, 나라에서 산정특례대상으로 급여치료비의 95%를 지원해 준다고 합니다. 한 달 벌어 한 달 살아야 하는데 비상금까지 헐게 생겼습니다. 수술 후 정상 근무는 한 달은 힘들 테니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겠어요.


수술 후 너무 아프지 않을까, 전절제를 하게 되면 심리적 상실감을 잘 극복할 수 있을까, 수술 전 검사에서 조직 검사 결과보다 더 나쁜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까, 수술 후 회복하더라도 암 재발에 대한 공포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비상금까지 헐고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온갖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옵니다.




이런 거군요.

중증질환을 갖게 된다는 건.

모든 일상을 허물었다가, 다시 쌓아 올려야 하는 것.


바닥을 칠 때마다 느낍니다.

아직 바닥이 아니었구나.

내가 지금 겪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은 얼마든지 많겠구나.


같은 이유로 나는 바닥이 아닙니다.

바닥이라면 오히려 감사한 일이죠.

올라갈 일만 남았으니까요.

필요 없다고 여기저기 쑤셔 박아놓은 패드를 잘 정리해야겠어요.

수술 상처가 아물 때쯤이면 필요하겠죠.

너무 늦지 않았을까 고민하던 사서 교육원에 지원도 해야겠습니다.

숨을 쉬고 있는 한 , 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이유들이 다 무색하게 느껴집니다.

변명만 하고 있다가 반갑지 않은 친구를 만나게 되니.


아프기 전엔 몰랐는데 헬조선이니 뭐니 해도

우리나라 의료보험 제도는 단연 최고입니다.

나라에서 무료로 해주는 건강검진 절대 빼먹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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