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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문 Nov 12. 2021

흔적

아프고 그리운

흔적

-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

자국

-다른 물건이 닿거나 묻어서 생긴 자리.

또는 어떤 것에 의하여 원래의 상태가 달라진 흔적.

(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




물컵이 놓여 있던 자리의 김이 서린 자국.

국을 떠먹으며 흘린 몇 방울의 국물 자국

얼마나 다급히 나갔음이 짐작되는 아이의 벗어놓은 옷가지들.

벤치 모서리에 조그맣게 새겨진 이니셜 자국.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이의 물건들.

-다리미, 안경, 메모, 신발, 벗어놓은 고무장갑까지.


죽음은 내가 이곳에서 살다 간 흔적, 혹은 눈물 자국이다.

실체는 없으나 흔적은 남아있고,

지우고 싶다고 지워지지도 않는 얼룩 자국 같은 것.

남겨진 이에게는 그리움의 흔적으로

떠나는 이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을  기억.




아빠가 떠나신 날도 그랬다. 모든 게 고요하고 그대로였다. 사고가 나고 구급차에 실려가시며 사망하시는 순간까지 그 모든 게 단 몇 시간의 일이었다. 밤새 그렇게 떠나시는 줄도 모르고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학교를 갔다.

학교에서 연락을 받고 조퇴하기 전까지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안 해 주셨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 삶에 뭔가 큰 지각변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교통사고 후의 모습에 우리가 놀랄까 봐 혹은 상처가 될까 봐,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흰 천으로 덮인 채 누워계신 모습만 기억난다. 그곳에 누워 있는 사람이 엊그제까지 나와 함께 집으로 가던 아빠라는 사실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일상으로 돌아오면 떠난 이의 빈자리는 무섭게 다가온다. 사람은 사라져도 물건들은 그대로니까.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자신의 몸에 닿았던 주인의 마지막 흔적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떠나신 분의 물건을 가지고 있는 건 상당히 아픈 일이다. 옷 하나, 물컵 하나, 연필 하나에도 살아있는 사람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잊을 수 없으니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의 물건을 제일 먼저 소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흔적을 지워야 잊을 수 있으니까. 잊어야 살 수가 있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죽음의 모습이다. 아프고 슬픈.




외할머니는 평생 자식만을 위해 살아오신 분이셨다.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신 적이 없으셨다. 드라마에 나오는 다정한 외할머니는 아니셨지만 자식이 전부였고 자식이 삶의 이유였다.

근검절약이 과해서 자식에게 용돈 한 푼 주시는 것도 인색하셨던 외할아버지의 비위를 맞춰가며, 자식들 손에 뭐라도 더 쥐어주고 싶어 늘 애가 타셨다. 아끼고 모아서 훗날 자식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싶었던 외할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린 자식들에게 인색한 남편이 야속해 속상해하셨다.


그렇게 고생만 하시다 암투병으로 돌아가신 할머니는 꽃상여를 타고 떠나셨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꽃상여를 처음 보았다. 꽃상여가 너무 예뻐서 슬펐고, 구슬픈 노래가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당신을 위해 꽃 한 송이 사지 못하셨을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화려한 꽃상여에 보내드리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도 같다.

고생만 하고 떠난 할머니를 소중히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 살아계실 때 꽃 한 송이 안겨주지 못한 미안함.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리움과 슬픔. 그런 할아버지의 마음을 싣고 꽃상여는 슬프게 할머니를 모셨다.



외할머니의 스테인리스 그릇이 엄마의 손을 거쳐 우리 집에 와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마침 엄마 집에 내가 원하는 사이즈와 재질의 그릇이 있을 뿐이었다. 투박한 스테인리스 그릇일 뿐인데 라면을 담아도 맛있어 보이고, 비빔밥을 담아도 그럴듯해 보인다.


할머니는 여기에 무얼 담아서 드셨을까? 구두쇠 할아버지 때문에 그릇 하나도 쉽게 바꾸지 못하셨을 텐데.

엄마는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이 그릇을 가져오셨을까?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나도 그릇을 쓸 때마다 할머니 생각이 가끔 나는데, 엄마는 더하셨겠지?


엄마는 외할머니께 한글을 못 가르쳐드린 게 내내 한이 다고 하셨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오시면서 한글을 못 배우셨던 외할머니가 유일하게 하고 싶으신 일이 한글을 배우는 것었다.


그게 뭐라고.. 이렇게 가실 줄 알았으면 진작 가르쳐 드릴 걸... 엄마는 아쉬워하신다.

그 말이 내게는

'이렇게 가실 줄 알았으면 좀 잘해드릴 걸...'

그렇게 들린다.


내가 기억하는 두 번째 죽음의 모습이다. 아프고 그리운.




죽음을 두 번이나 보았지만 나는 아직도 죽음이 와닿지 않는다. 이별의 아픔,  그리움,  그런 느낌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아빠가 세상에서 머무른 시간보다 더 많이 머물러있고,

할머니가 계셨던 시간만큼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준비도 안 하는데 ,
그런 상태에서의 죽음은
느닷없는 피살과 같아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깊어진다고 봅니다.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법정스님 말씀-



삶은 나한테만 왜 이렇게 야박한가,

나만 왜 이렇게 버거운가, 원망스러울 때면

법정 스님 말씀을 떠올린다.

내 삶도 이 생에서 잠시 빌려 쓰는 것뿐이라는 말씀,

그러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 어차피 모두 놓고 떠날 거라는 말씀은 내 원망을 조금은 차분하게 만든다.

영원이 아니니까 힘들어도 잠시일 뿐이라고.

그렇게 죽음이 삶에 위로가 되기도 한다.


언젠가 내가 세상을 떠나면

내가 올렸던 글, 내가 찍었던 사진, 내가 만들었던 덕질 영상,

내 것이나 내 것이 아닌 그들도 모두 나의 흔적으로 남을까?  

흔적이 남아있은 들 떠난 내가 알 리야 없겠지만,


지나가는 누군가가

가끔 내 글을 읽어주고,

 피드의  스쳐가

내가 올렸던 덕질 영상을 가끔 플레이해주는 정도.

그 정도 흔적이 좋겠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조금 슬픈 것 같다.


원망스럽다면서 것도 삶이라고.... 아쉬운가 보다.

나를 아는 사람에게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딱, 그 정도 흔적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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