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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문 Nov 16. 2021

소녀

아직은 설레이고 싶은

덕질
: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
- 네이버 우리말샘-


응답하라 시리즈의 못 말리는 덕질러 여고생은 오빠들을 당당하게 보기 위해 방송국 작가가 된다. 드라마 속 설정이려니 생각했는데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실제 주인공이 출연했다. 정말로 응원하는 오빠들을 보기 위해 방송국 막내 작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덕질만 했는데 꿈을 발견하다니 이렇게 로맨틱한 결론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게 덕질의 순기능?!


꿈까지는 아니지만 내 글의 출발도 덕질이었다.

10대 때도 안 하던 덕질을 이 나이에 왜 하냐고?

하긴 여고생의 나도 덕질이 뭔지 몰랐다.

덕질의 정서는 덕질을 해봐야  수 있다. 덕통 사고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갑자기 시작되기 때문이다.

별안간 삶 속으로 훅 들어오는 것,

고요한 하늘에서 내 품으로 떨어지는 별똥별 처럼.




집에서 편안히 들으면 되는 노래를 굳이 왜 공연장까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음악을 좋아해서 하루 종일 듣고 있지만 굳이 공연장에?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 나의 귀를 확 트이게 해 준 음악을 만난 것이다. 우연히 갔던 콘서트장에서.

그래서 시작돼버렸다.

꽤 늦은 나이에 새삼스런 덕질이.


대중가요와 드라마 ost를 좋아하는 내 취향과 다른 클래식한 음악이었다.

그런데 왜 내 가슴을 울렸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 듣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내 귀를 울리고 가슴으로 흘러들어왔다.

빙판처럼 꽝꽝 얼어있던 마음에 따스한 햇살이 들어와 사르르 녹았고, 쌓이고 쌓이다 돌덩이가 된 슬픔이 가루가 되어 눈물을 타고 흘러나왔다. 단단한 빙판에 작은 실금 하나 간 줄 알았는데, 두꺼운 빙판이 깨지면서 마음이 출렁거렸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눈물을 흘리고는 후련했다.

결혼 후 한 번도 편안하게 내쉬어 본 적 없던 숨이 처음으로 쉬어졌다.




바로잡으려 할수록 엉켜버리는 결혼 생활, 더 이상 할 수 있는 최선도 없는 상황에서 무능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던 시간이었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삶이 너무 무거워서 다 팽개치고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세상에 혼자된 것 같은 절망감에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었었다.


그런 나에게 덕질은 도피처였다. 현실에서 사라지고 싶을 때면 나타나는 투명 망토 같은 것. 망토를 입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것 같아서 잠시나마 안심이 되는 공간.

나한테 덕질은 그랬다.

묵혀 있던 감정을 조금씩 풀기 시작했고, 나를 향한 원망을 멈출 수 있었다.


스타를 응원하기 위한 공간이지만, 사적인 고민 나누면서 많은 감정들의 공유가 가능했다. 아마 다양한 연령대의 팬층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아티스트만를 응원하는 공간이었다면 카페는커녕 노래만 잠시 듣다가 끝났을지 모른다.

힘들고 속상하고 기뻤던,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공연과 음악 이야기까지.

어느새 그 곳에서 많은 위로를 받고 있었다.

방치했던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글로 소통하면서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마음이 커져서 이곳 브런치까지 찾아왔으니, 브런치의 시작은 덕질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다.  




어느 공연장에서 엄마 연배의 팬 분을 만난 적이 있다.

" 팬카페 너무 재밌어요. 이 나이에 딱히 재밌는 일도 없고 지루했는데, 새로운 음악도 듣고 sns도 배우고 젊어지는 느낌이에요."

설렘으로 가득한 그분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몸은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도, 마음속의 소녀는 나이를 먹지 않나보다. 여전히 꽃이 피면 마음도 피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 마음도 촉촉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다시 못 볼 이 가을아쉽고, 눈이 오면 특별한 일이 생겼으면 하는 상상도 해본다.


10대에는 노래하는 오빠들에게 , 20대엔 연인에게, 30대엔 아이에게.

어찌 보면 대상만 바뀔 뿐 삶은 덕질의 연속 아닐까?

특정 대상에게 사랑을 쏟아붓는 것,

그 감정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지는 것.

덕질이 별건가.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라 대상이 사라져서겠지.

설레임이라는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는 것 같다.

마음속 소녀는 여전히 설렐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삶에 설렘이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아침 햇살처럼 눈부시고, 푸른 하늘처럼 벅찬 일이다.

열정과 설렘이 사라진 것만큼 재미없는 삶이 또 있을까

그것이 지루함을 잊게 해주는 설렘이건,

고단한 일상을 잊기 위한 투명 망토이건 ,

지금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초록빛 머금은 새싹이었지
붉은빛 머금은 꽃송이였지
나를 찾던 벌과 사랑을 했지
그 추억 그리워 꽃밭에 있지

나는 다시 피어날 수 없지만
나를 찾던 벌도 사라졌지만
나의 사랑 너의 얼굴에 남아
너를 안을 때 난 꽃밭에 있어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
가사 중에서-


 

꽃이 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그렇게 피어있으면 하는 마음으로

꽃 사진을 찍는 엄마는

아직도 소녀이고 싶을지 모른다.


공연을 보는 동안 잠시 나는 그리웠던 소녀가 된다.

그렇게 몇 시간 설렘을 가슴에 가득 채우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행복감으로 다른 날들을 버틸 힘을 얻는다.


늦은 나이에 굳이 왜 덕질이냐고?

버티려고, 잊으려고,

이 순간이라도 행복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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