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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문 Mar 27. 2022

무례할 권리는 없다

그래도 되는 사람은 없다

호기롭게 시작한 경력 쌓기의 첫 도전은 실망과 회의로 얼룩진 채 안타깝게 끝났다. 지금부터라도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간다면 나도 꽤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할머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꿈을 꾸었다. 역시 꿈은 꿀 때가 달콤하다.


첫 달은 익숙해지지 않아서 힘든 거라고 생각했다.

휴무도 연차도, 업무가 익숙해지면 사용하는 게 어떻게냐는 선임의 말이, 먼저 시작한 선배의 진심 어린 조언인 줄 알았다. 휴무날 갑작스럽게 근무해줄 수 없겠냐는 선임의 요청이, 힘들면 자신이 근무하겠으니 부담 가지지 말라는 부탁이, 배려인 줄 알았다. 오죽 급하면 휴무인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할까, 몸이 부서져라 일한 일주일 끝의 휴무였지만, 힘들 때 서로 돕는 거지...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

직장에서 진심이 되면 상처받기 쉽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의 마음이란 한없이 감성적이고 나약하기 그지없어서... 또 반복하게 된다.


진심이었던 나에게 돌아온 것은, 휴무날 근무한 임금을 상사에게 물어봐야 휴일근로수당을 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는 무책임한 대답이었다. 이미 휴무일에 근로를 했는데, 운영진이 임금을 지급하면 받을 수 있고 못 받으면 이월시켜야 한다는 당당한 대답이었다. 근로 기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병원의 태도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같은 피고용인이고 같은 영양사면서, 자신의 실리만 챙기는 선임의 이기적인 모습이었다.


내가 또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려서 상처를 받는구나... 이 나이에 아직도 배울 세상이 있구나.... 새삼 또 배운다. 조리원 분들의 휴무는 절대로 이월하지 않으면서, 후임들 근무만 자신의 편의대로 조정하고, 보상조차 해주지 않는 선임, 조리원 분들에게 그렇게 했다가는 당장 그만둘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휴게 시간 포함 9시간(근로계약서 상으로만) 근무인 주말 1인 근무, 11시간 가까이 휴게 시간 없이 일해야 하는 하루 일정을 뻔히 알면서, 근무 시간 조정을 병원에 건의하지 않는다. 선임 본인은 절대 1인 근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지 않으니 후임의 고충이야 알 바 아니라는 사고방식, 영양사의 현실적인 처우가 얼마나 열악한지 알면서 모른 척하는 그녀의 이기적인 태도에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월말까지 근무하고 퇴직하겠다는 의사를 월 초에 밝혔다.


이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너무나 근무를 원했지만 쉽게 오지 않던 기회가 감사하게 왔다. 현직 선생님의 출산 휴가로 하루라도 급한 상황에서 합격이 결정되었고, 당일에 인수인계까지 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려면 학교와 계약서를 작성해야 했다. 현재 적을 두고 있는 병원에 퇴직 처리를 요청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휴무날이었고,  전화로 요청드리는 것이 죄송했지만, 나는 월초에 이미 퇴직 의사를 밝혔다. 후임도 채용이 되었고 이미 출근 중이다. 2명 중 1명만 출근하고 있지만, 4월부터 다른 한 분도 근무를 하신다. 월말까지 근무한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5일 앞당겨진 퇴직 요청이었다. 양해를 구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알바도 아니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요청을 하시면 안 됩니다. 처리해 드릴 수 없어요. 병원에 영양사 면허증이 3개는 등재되어야 병원 수가에 지장이 없습니다. 현재 근무하시게 된 후임 선생님은 이제 갓 졸업하셔서 아직 면허증이 발급되기 전이고, 다른 한 분은 4월부터 근무신데, 선생님이 지금 퇴직하시면 영양사 면허증 하나가 부족합니다. "

죄송하다고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건 당신 사정이지 내 알바 아니라는 대답이었고, 총무과에 물어보겠다더니 전화도 문자도 톡도 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다. 학교에 상황을 설명하니 당장 확답을 받지 않으면 채용이 취소될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그렇게,

힘들게 합격한 첫 학교 채용은, 날아가 버렸다. 금방 취업이 되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에, 퇴직 정리 기간을 길게 잡은 것이 잘못이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하는데, 양손에 떡을 쥐고 있다가 먹고 싶은 떡은 땅에 떨어뜨리고, 먹기 싫은 떡만 손에 쥐게 되었다.


채용은 취소되어 속상했지만, 마지막이니 좋은 게 좋다고(?) 토, 일, 월 3일 더 근무하고 퇴사하겠다고 총무과에 직접 전화를 했다. 톡도 문자도 보지 않던 선임은 통화내용을 문자로 남기니 그제야 답이 왔다.

"29일 근무 안되나요?"

퇴사하겠다는 다음 날 출근이 안되냐는 질문이었다.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대로 출근하면서 면접을 보는 것은 지금 근무하는 병원에도, 이직할 곳에도 민폐가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감정적으로 힘들기도 했다. 한참 뒤에 톡이 왔다.

"월요일에 제 책상 위에 사직서 올려놓으시고, 토, 일, 월 성실하게 근무해 주세요."

출근 전날이 아빠 제사여서 친정에 갔다가 다음 날 출근 때문에 밤에 돌아와야 하는 나에게, 본인 뜻대로 되지 않아 심기 불편함이 느껴지는 선임의 문자는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업무가 채 익숙해지기 전부터 대부분의 주말 근무를 나 혼자 했었고, 본인은 연차, 반차, 다 챙기면서 주말은 1인 근무이니 힘들어서 절대 하지 않으면서, 마치 그동안 내가 성실하게 근무하지 않은 것처럼 묘하게 비꼬는 문자에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채용이 취소된 아쉬움이 커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내일 출근하는 대로 사직서 작성해서 책상에 올려드리겠습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성실히 아니 미련하리만큼 열심히 근무했다. 심지어 정규 근무 시간보다 평균적으로 한두 시간씩 더 근무했다.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적도, 보상 요청을 한 적이 없다. 그런 내 지난 시간들을, 말 한마디로 부정당하는 것은 참기 어려웠다.


"작성하는 것은 선생님 마음대로 하시고 월요일 제가 출근할 때 책상에 올려 주세요. 지시를 하면 지시를 따르셨으면 합니다."

무례하다 못해 억지로 가득한 그녀의 문자에 참고 있던 화가 폭발했다. 주말은 혼자 근무하고, 월요일에 선임이 출근하니 그전에 작성해서 책상 위에 올려두겠다는 내 말이 어디가 잘못된 거지? 무슨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걸까? 본인이 월요일에 출근하니 월요일에 작성해서 올려두어야 하는데, 주말에 작성해서 미리 올려 두는 게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거라는 것이다.

그동안 누구 못지않게 성실하게 근무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고, 성실히 지시에 응했는데, 어떤 부분이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셨냐고 물어보는 내 질문에, 구구절절 말도 안 되는 변명의 답이 왔다.


아빠 제사 때문에 친정에 온 동생은, 바보같이 그 말을 다 듣고 왜 출근하냐고 했다.  미리 퇴직 의사 밝혔고 후임이 출근 중이고, 업무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고, 본인들이 면허증 발급도 안된 사람을 채용해 놓고는 퇴사하는 사람에게 면허증 때문에 나가지 말라니, 21세기에 이무슨 경우없는 억지냐고 했다. 대기업도 본인 의지로 퇴직하는데 , 병원 영양사 면허증이 몇 개든 그걸 퇴사하는 사람이 왜 신경 쓰냐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내가 며칠을 더 출근하든 뒷말은 나올 텐데, 아직도 좋은 사람이고 싶은 병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불편한 감정 상태로는 도저히 근무가 가능할 것 같지 않아서 퇴직 처리해달라는 요청을 드렸다.

갑작스럽게 주말 근무를 하게 된 선임은 화가 났을 것이다. 본인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근무를 해야 하니 분한 모양이었다. 퇴직 처리 요청을 직접 하라고 문자가 왔다. 어이가 없었다. 본인을 통해 퇴직 절차를 밟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하더니, 이럴 거면 처음 내가 요청했을 때 그렇게 얘기할 일이지. 마지막이라고 좋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내 어리석은 믿음의 결과이다. 그녀의 말만 믿고 총무과로 요청할 생각도 못한 내 무지함이 잘못이다.




며칠 전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하신 윤여정 배우님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그녀의 노트에 메모되어 있는 김수현 작가님의 대사,

누구도 다른 누구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

그렇게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

경영진의 부당한 처우에는 아무런 이의 제기도 하지 않고

조리원 분들이 부당하게 무시당하는 것은 모른 척 하고

그저 윗선에 잘보이는 게 우선인 선임.

어떻게 관리자라는 사람이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을까..

자신을 믿고 따르는 후임들을

자신의 편의를 위해 이용만 하려는

실망스러운 선임의 모습에 많은 생각이 든다.


대놓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경영진과 뭐가 다른가.

코로나 격리 기간 동안 무급 처리, 그래서 만근을 못했으니 하필 그 주에 있던 선거일도 휴무에서 제외, 주말 휴무도 제외한다는 병원 측의 주장이다.

주말 휴무는 그렇다 치더라도, 만근과 무관한 법정 공휴일인 선거일이 왜 휴무에선 제외되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아서 고용노동부에 문의 중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규정을 제시하며, 근무한 만큼의 임금 지급도 제대로 하지 않으려는 경영진은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까. 임금을 주기 싫으면 경영을 하지 말아야지. 이 무슨 도둑 심보인지 모르겠다.  본인의 이익만 챙기는 선임의 비상식적인 태도도 마찬가지다.


최저 시급이 오르면 뭐하나, 버젓이 큰 병원이라는 곳도 직원들의  복지는 커녕 기본적인 임금조차 보장되지 않는데. 이런 곳은 뉴스에서나 보는 줄 알았는데,.. 참 씁쓸하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관리자는 못 되더라도, 피해를 주지는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 성실히 일하고 받는 임금 까지 착취하지는 않아야 하는거 아닌가.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할까 걱정하며 근무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추가임금을 지급하기 싫으면 추가 근무를 강요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이 전란 후도 아니고,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행패인지 .


누군가를 끌어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적어도 저런 모습은 아니어야 하는데...

두렵다.

시간이 흘러 잊어버릴까봐...

나도 모르게 그런 사람이 될까봐...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될까봐...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지금과 다르지 않을까봐...

그것이 가장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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