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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Apr 26. 2022

본성에 관하여


생각 하나. 두 세계


 한 후배가 어떤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르고 변덕을 부린다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둘 사이에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어떻게 화해시킬까 궁리하다가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겉과 속이 같고, 변화가 없으면 그건 사람이 아닐 거야”. 사람의 마음은 머릿속에 있을 것이고, 사람의 뇌세포가 천억 개 즈음 된다는데, 어찌 사람 마음이 복잡다단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보면, “주변에는 어두운 폭력도 있지만, 한발짝 달아나면 어머니 곁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이상한 것은 두 세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마도, 두 세계가 닿아 있는 것은 외부의 공간만이 아닐 것입니다. 마음속의 어두운 공간과 밝은 공간이 그 둘 사이에 아무런 차단막도 없이 맞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찰라생 찰라멸’이라는 말처럼, 사람의 마음 속의 선과 악도 순간순간 생멸하나 봅니다. 용납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내 마음 변한다고 미안해하지 마라. 세상의 마음도 변하니

세상의 마음 변한다고 서운해하지 마라. 내 마음도 변하니





생각 둘. 본성에 대한 변명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설렁탕 한 그릇을 받았습니다. 희뿌연 육수에 절편 같은 고기가 담겨 있습니다. 식사할 때 그러면 안 되는데, 문득 어제 서점에서 읽었던 도축장을 주제로 한 어느 시인의 시가 나도 모르게 떠올랐습니다. 식재료로 쓰일 짐승의 서글픈 마지막 모습과 인간의 폭력적 본성을 이야기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영상으로 도축장의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생명체에서 식재료로 바뀌기 전에 두려움으로 가득 찬 짐승의 눈망울이 자기의 차례를 속절없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구슬픈 울음소리는 평상시 그저 미물로만 보였던 짐승들에게도 삶의 언어가 있었다는 착각을 들게 합니다.


 생물에는 동물과 식물이라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즉, 식물도 생물입니다. 그런 경험은 없지만, 식물도 동물처럼 사람과 교감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어떤 극단적인 채식주의자, 아니 거식주의자는 나물이며 채소가 끼니를 위해 본인의 입속에서 잘근잘근 씹혀지는 모습조차도 폭력적인 것은 아니었는가 하며 성찰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폭력의 근원은,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기 이전에 인간의 억울한 굴레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굴레이기에 본성이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고기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힘들게 태어난 생명이나, 무언가 떨떠름해 하고 있을 무의식을 구태여 들여다보지 않고, 소모된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를 아득한 익숙함으로 그 살점을 씹고 있는 생명이나 어딘가 석연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금강야차와 같은 절대강자의 두려운 모습으로 무고한 생명체를 향해 쇠붙이를 내리치던 도축장 인부가 하루 일을 마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 꾸부정한 어깨를 하고 온순한 모습으로 허름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합니다. 그에게도 물론, 어떤 거친 일을 해서라도 부양해야 하는 소중한 가족이 있습니다. 그가 매일 저녁 국밥에 꼭 곁들여 마셔야 하는 소주 한 병은 알코올중독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정당한 보상인지 미안한 욕망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은 부질 없다며 다시 무념의 상태가 되어 내 앞에 놓인 설렁탕의 고기를 먹었던 나는 오늘만큼은 왠지 마치 무슨 누명이나 뒤집어쓰고 있다는 듯, 육식을 하는 나와 사람들을 위해 변호해 주고 싶었습니다.





생각 셋. 게바라의 독백


 안데스 산맥 여기저기에 본능의 흔적을 감추진 못한 생물의 잔해가 남아있을 게다. 음식물   향내는 아직 땅속 깊이 스며들지 못했고 즐겨 읽던 낡은 에세이 떨어져 나간 종이 자락도 채 흙이 되지 못했다. 매일같이줄어만 가는 탄약처럼 광활했던 대지는 좁아만 간다. 오늘도 다시 새벽이 번지며 시작되겠지만, 이 산맥에 처음 들어와 보았던 이슬 내음 차오르는 아침도 거대한 협곡 그림자에 자꾸만 풀썩 주저앉는다. 하늘로 몸을 덮고 솔잎 향내 나지막이 배인 흙 침대에 잠을 청하던 낭만은 계곡 여기저기 흩어진 나무들도 기억하는데 언제부턴가 어느 차가운 널빤지 위에 묶이어 조각조각 갈라지는 꿈을 꾸고 꿈에서 깨면 꿈보다 답답한 하늘이 내리누른다. 어느 마을의 연기가 두 눈가에 훈훈해지면 처져 있던 나뭇가지들이 다시 힘차게 수분을 끌어올린다. 그러면 또 며칠 밤낮이 흔적없이 지나갈 것이다. 곧 유난히도 설레는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저편 너머에 햇빛이 섬광으로 빛나련만 나는 음산한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서너 번 꿈틀거리다가 여태껏 말없이 따라온 플죽은 사내에게 한두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넬 겨를도 없이 너무 쉽게 현실 속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체 게바라는 원래 의사였으나, 중남미 지역에서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도 함께 했습니다. 사회를 변혁하려는 혁명가의 삶, 그 내면의 처절함과 험난함을 일단 접어두고 보면 어쩐지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그것이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상황에 내몰려져 걷게 된 길이 아니라, 다분히 개인의 선택에 의한 길이라면 더욱더.


 사람은 가끔 가지 못한 길을 그리워합니다.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사람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 무난함에서 가끔이라도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 있고, 휘몰아치는 풍파에 던져진 삶을 사는 사람은 설령 그것이 자신의 선택에 의한 삶일지라도, 가끔은 그저 무난하기만 해도 만족스러운 그런 삶을 그려 볼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경우에서, 두 명의 자신이 내면에서 늘 겨루기도 하고, 어느 한 자신이 다른 자신을 누르면서 그의 삶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끝까지 끌고 가기도 합니다.

   
 마지막 대지에 이르렀을 때, 그토록 갈구하던 바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돌보아주지 못했던 길 저편의 소중함을 돌아볼 때 마음이 저며올 것입니다. 이국의 전선에서 고향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게바라는 아들이 살아 있기를 바라는 늙은 어머니의 아픔을 헤아리며, 어머니를 향한 진한 그리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게바라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최후를 기꺼이 맞이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볼리비아군에 체포되어 차가운 바닥에 눕히어져 최후를 준비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아무도 곁에 없는 잠자리에서나 가끔 모습을 보일 뿐, 그동안 숨죽이며 살고 있었던 그의 또 다른 자신을 볼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숨죽여 왔던 그가 여전히 결연하고 고집스러운 모습의 그에게 원망과 용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존중의 미소를 보내주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흔들리면서도

앞을 향해 내딛는 그대

그 모습을

어쩌지도 못하고

지켜보며 따라오는

음영 속의 또 다른 그대





생각 넷. 자연의 거역


 양 떼 앞에 선 배고픈 늑대는 가장 약하게 보이는 한 마리를 골라 집중적으로 물어뜯는다고 합니다. 한 마리가 당하고 있는 동안 다른 양들은 그 장면을 그저 바라만 봅니다. 어린 학생들 세계에서도, 가끔 성숙한 어른들의 세계에서도 같은 상황이 연출됩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늑대의 모습은 차라리 위로가 되었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세상의 비정한 모습들이 어쩌면 자연의 법칙이요 순리일 수도 있기에. 그러나, 늑대는 생존을 위한 잔인함이나, 사람의 그것은 이익과 유희를 위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의 섬이 아니라는 존 던 시인의 말처럼, 어떠한 영혼의 상처도 결국 우리 모두의 상처가 됩니다. 무모하고 버거운 일이라도,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우리는 힘닿는 데까지 자연을 거슬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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