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의 여유

<30년 차 경찰관의 기록>

by 알콜헌터

<이 글은 현직 경찰관이 지구대 근무 중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날 야간근무.


5조 3교대를 하다 보면 명절에 근무가 걸리는 일은 흔하다.

뭐 복불복이다.


명절에는 유독 폭력신고가 많다.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니 오히려 싸운다.

형제자매, 친척들이 모이는 날이 그렇다.


지구대 벽에 붙어있는 디지털시계가 9시로 변하기 직전 지령대에서 강한 알람이 울렸다.


'코드 0'(최우선 출동)였다.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가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러 올라가 있고, 아이는 직접 112에 전화를 해 "이제 죽으려고 한다."라고 알렸다.


우리 지구대 순찰차 4대 모두 현장으로 달렸다.


현장으로 가는 내내 울려대는 순찰차 사이렌 소리가 오랜만이다. 그 소리에 순찰차 안에도 긴장감이 돌았다.

운전대를 잡은 강순경과 나는 현장도착 전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1층에 사람이 보였다. 어두웠지만 여성으로 보였고, 나이는 가늠할 수 없었다.

가까이 가보니 어린 여자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름을 불렀다.

"혹시 최수연(가명)이니?" "네"


"옥상에서 내려온 거야?" "네"


"경찰관 언니가 1층으로 내려가 있으라고 했어요. 그래서 내려온 건데"


최수연이 112에 전화를 했을 때 지령실 경찰관이 전화를 끊지 않게 하고 계속 설득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 잘했어"


수연이를 순찰차에 태우고 지구대로 향했다. 같은 시간 경찰서 여성청소년계에서도 지구대로 출발했다고 했다.


바로 보호자인 엄마와 연락이 닿았다.

"저녁 먹고 바람 쐬러 간다고 나갔는데.... 집에서는 아무 일 없었어요!"


수연이는 우울증과 충동장애 치료 중이라고 했고, 1달 전쯤 정신병원에서 퇴원했지만 상태가 전 보다 더 심해지고 있다고 했다.


지구대에 도착한 수연이는 여성 쉼터를 요구했다. 집에는 들어가기 싫다고. 절대 안 들어가겠다고.


난감했다. 아직 학생이고 보호자 인계가 제일 적절한 조치지만 이를 거부하고 있고 자해까지 한 전력이 있어 쉼터인계도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1시간가량 여성청소년 담당직원과 면담이 이어지면서 많이 진정된 듯했다.


엄마가 지구대와 있는데 만나보겠냐는 제안에 약간 뜸 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서로 미안하다는 대화가 오갔다.

그런데 엄마가 흐느껴 울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나빠졌다.

수연이는 엄마의 울음소리에 반응했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결국 응급의료팀의 지원을 받아 응급입원시키기로 결정했다


병원은 가기 싫다며 악을 쓰며 우는 수연이를 달래고 달랬다.

길어야 3일간 병원에 있을 거고 휴대폰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조건을 걸고 구급차에 올랐다.


떠나는 수연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치료 잘 받고 안정 취하고 와"


"네~"

방금 전까지 울던 수연이가 아니다. 마치 새로운 곳으로 놀러 가는 어린아이 같았다.


지구대 뒤편 벽에 서 있던 엄마의 흐느낌이 더 크게 들렸다.


수연이를 보내고 커피 한잔을 내리려고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또 한 건의 신고가 떨어졌다.


가정폭력 사건이다.


두두둑~~ 원두 갈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부랴부랴 현장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어 다시 두세 번 더 두드리니 문이 열렸다.


덩치가 있는 50대 남자였고 이미 술에 취해있었다.


같이 출동한 박 경위가 "들어가도 될까요!"라니

남자는 "들어올 거면서 왜 물어보냐!. 나가! 들어오지 마!"라며 공격성을 보이고 있었다.


현장상황을 빠르게 살폈다.

거실테이블에는 껍질이 반쯤 벗겨진 땅콩이 흐트러져 있고, 한자가 적힌 큼지막한 플라스틱 소주통이 놓여있었다.


남자의 공격성에 대비해 주변에 위험물이 있는지도 살폈다.


다행히 부인의 상태는 심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먹으로 전신을 맞았다. 그리고 의자로 찍는 듯한 위협을 받았다.


분리조치가 필요했고 우리는 곧 남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체포과정에서 남자는 내일 출근해야 하고 홍콩 관광객들 예약되어 있다고 했다.


박 경위가 물었다.

"무슨 일 하시는데요?"


"전세버스요"


"내일 버스 운전하실 분이 38도짜리 고량주를 2리터나 드셨나요?"

역시 빠른 박 경위다. 알코올도수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박 경위 한 마디에 남자의 공격성은 기세가 확 꺾였다.


부인으로부터 피해진술을 받는 과정에서 오늘 싸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들은 재혼가정으로 각자 자녀가 있었다고 했다.

명절에 찾아온 남편의 아이들을 홀대했다는 이유였다.


"뭘 얼마나 잘해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한두 번이 아니에요. 애들 왔다 가면 꼭 이래요"


하지만 남자는 유치장에 입감 될 때까지도 부인을 때린 이유를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남자를 보내고 난 후 다시 커피머신으로 갔다.

다시 버튼을 누르고 두두둑~~

진하게 뿌려대는 커피 향을 더 느껴보고 싶어 종이컵에 코를 묻었다.


커피타임을 끝내니 폭력사건이 떨어졌다.


남자들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신고였고 주점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싸움이 크게 번질 경우를 대비해 순찰차 두 대를 배정했다.


우리 차량이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모두 젊은 사람들이다. 순찰차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이런 시선은 항상 부담스럽다.


나는 내리자마자

나를 쳐다보는 수십 명의 얼굴을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살폈다.


누구도 먼저 얘기하지 않았다. 현장에 적막이 흘렀다.


나는 오른손을 슬며시 들며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신고한 사람 손요"


청년 무리 가운데 있던 한 명이 손을 들며 말했다.

"여기요"


그 순간 반대편에서 소리가 터졌다.

"씨발 맞은 건 나거든"


순찰차 한 대씩 분리해서 진술을 받은 후 귀가시키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돌아오는 순찰차 안에서 핸들을 잡고 있던 강 순경이 한마디 했다.

"왜 좋은 설날에 술 마시고 싸우는 걸까요? 새벽 세 시가 다돼 가는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게."


이어 나온 강순경의 한마디.

"팀장님, 아까 도착해서 신고한 사람 손들라고 할 때 초등학교 선생님 같아 보였어요 하하하"


"그래? 나 한때 꿈이 선생님이었던 적도 있었어."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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