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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꽃 Aug 10. 2023

잘하고 싶었던 게 잘못이었다

바라지 말아야 함을 멍청하게 이제야 알았다.

결혼초 버스로 한 시간이 걸리는 시댁을 주말마다 찾아뵀다.

아기띠를 하고 한 손엔 분유 담긴 가방을 들고서.

주말마다 기다리긴 하셨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강요한 적은 없었다.

그저 내가 부모님께 잘하고 싶었다.

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용돈 한번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마음까지 담아 '내가 좀 고생하지.' 하는 마음에 힘들어도 참을만했다.


여섯 번이나 있는 제사도 달력에 크게 적어놓고 빠짐없이 참석했다. 평일에는 퇴근 후 찾아뵈었지만, 주말에라도 걸리면 아침부터 제사음식 준비를 했다.  형님이 늦게 와도 아니 음식 다 할 때쯤 와서 앞치마 두르고 혼자 다 한 것처럼 인사를 받아도 참았다.  집에 오는 길에 가끔씩 남편에게는 투덜거렸지만 어머님께는 표시 한번 낸 적 없었다.  왜냐하면 똑같이 여자의 두 눈을 가졌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겪었으니 다 아실 거라 믿었었다. 대장부 같은 어머님이 깔끔하게 정리를 해 주실 거라 믿고 기다렸지만, 엄머님은 도리어 내게 하소연만 할 뿐 그 어떤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하셨다.


참으면 복이 온다더니 복은 무슨 개뿔.

한 번을 참으니 두 번을 참으라 하고, 한 개를 내주고 나니 도리어 한 개 더 내놓으라 한다.

욕심쟁이 형님에 앞에서 그나마 내 것도 잘 못 챙기는 남편과 나는 그야말로 식은 죽이었을 것이다.

속으로 곪기 전에 순간 서운해도 서로 말해가며 사는 친정과는 달리 내가 말만 하려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고 이해한다고 하면서 쉬쉬 덮기에 바빴다.  남편도 같은 색깔의 사람이라 집에서는 같이 흥분하고 이해한다 했지만 늘 어린 내가 참아주기를 바랐다.  수많은 게 쌓이고 쌓여 속으로 곪기 시작하니 점점 가족끼리 모이는 게 줄어들었고, 점점 선을 정확히 지키기 시작했다.  남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날도 제삿날이었다.  사실 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회사에 일이 있어 처음으로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  가까이 사는 큰며느리도 바쁜 나도 셋째도 아무도 오질 않았던 것이다.  전화를 드렸더니 대뜸 너까지 안 오면 어떡하냐고 역정을 내셨다. 너까지...

훨씬 기가 막힌 일도 어처구니없는 일도 비상식적 인일도 그동안 잘 참아왔지만, 이 세 글자 너. 까. 지. 가 내 마음을 접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참지 않고 말씀드리기로 맘먹었다.

하지만, 그동안 긴 세월 참기만 하다 보니 쉽지가 않았다.  말할 기회만 살피다가 돌아오고 어쩔 때는 그냥 내가 한번 참는 게 더 편할 때도 있었다.  열 번을 참고 한번 말하면 어머님은 늘 서운해하셨고 몇 번 겹치니

"둘째는 은근히 차갑더라." 그렇게 말씀하셨다.


부모님의 맹목적인 첫째 아들 사랑에 형제들이 멍들고 있음을 분명 아셨는데 끝까지 모른 척하셨다.

도리어 큰아들의 욕심으로 일이 커지면 어머님은 온몸으로 막아 내셨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욕심은 더욱 커지고... 제멋대로 칼을 휘둘러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는 걸 알게 된 욕심쟁이들은 가족은 나중에라도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믿음아래 더욱 이기적인 일들을 쉼 없이 일으키고 말았다.


결국 시댁식구들은 무슨 날 무슨 날에만 모인다.  예전처럼 부대끼며 술 한잔 하던 시절은 끝이 나 버렸다.  

최소한의 시간만 쓰기로 한 것처럼 할 도리만 소리 없이 하면서 늦게 와서 일찍 헤어지게 되었다.  

큰일을 겪고 나니 도리어 어머님과 형님이 미안하다 할까 두렵다.

미안하다 했는데 용서를 안 하면 그때부터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세상이니깐.

몇 년이 지나도 용서가 안되는데, 나는 준비가 덜 되었는데 미안하다 하면 어찌하나 싶었고, 그동안의 아픔이 너무 허무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 생각에 제발 하지 마라 했는데, 역시나 이 또한 내 착각이었다.

그들은 칼로 도려낸 것처럼 삭제하곤 너무나 평온한척 한다. 진짜 평온할지도 모를일이다.


많이 아프고  다 포기하고나서야 알았다.

생긴 게 달라 때린 놈은 발 뻗고 자고 맘 약한 맞은 놈은 곱씹으며 아플 수도 있다는 것을.

가족끼리 안 보고 산다는 얘기에 무조건 자식이 잘못한 거라 말했던 나의 어리석었음을.

나중에 알 거라는 기대감은 애초 갖은 게 아니라는 것을.


나름 살아보니 도리는 그저 도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식으로 할 도리라 생각하면 비교하거나 작은 칭찬이라도 바라면 안 되며  내가 행함이 전부가 되어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기분 좋게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하는 것을 잘하려고 애쓴 게 잘못이었고, 해놓고 알아주기를 바란게 최고의 잘못이었다.

적당히 거리를 만들고 적당히 하는 며느리가 되어보니 도리어 편안해졌다. 몸도 마음도.


나는 아들들에게 말한다.

시어머니가 엄마가 될 수 없으며

혹여 엄마와 아내가 삐그덕 거리는 일이 생기면 무조건 아내 편을 들어야 한다고.

엄마는 아빠가 있으니 니 아내 편은 네가 들어줘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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