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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 Jul 20. 2022

수필과 논증문의 거리

        

약 20여 년 만에 수필 합평회에 갔다. 가는 길에 칼럼 정도 분량 글을 한 편 갖고 갔다. 수필은 문학적 감수성이 있는 글맛이 있어야 하니 옛 신혼 시절을 회상하는 글을 갖고 갔다. 회상하는 글은 비교적 따뜻한 느낌을 주기도 하니까.   

  

수필 합평회는 출판사 건물 3층 사무실에서 했다. 건물 입구부터 출판사 특유의 잉크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좋았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모두 낯선 얼굴들이지만 선생님은 그대로셨다. 중절모를 쓰시고 남방 계열의 무늬가 있는 셔츠로 멋을 낸 선생님은 빙긋 미소를 지으셨다.   

       

“어서 와~”    

      

‘어서 와’ 이 말 속에는 참으로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20여 년 간 바쁜 시간을 보낸 나를, 선생님은 알고 계시다. 좁은 지역이고 수필 합평 모임을 못 나가게 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차를 마시고 서로 인사를 한 후 합평을 시작했다. 회원이 써 온 수필을 보았다. 수식 표현이 눈에 거슬렸고 지나치게 미사여구가 많아 보였다. 먼저 회원들의 평이 이어졌고, 그 후로 선생님 평이 이어졌다. 그동안 선생님의 수필에 대한 안목은 더 깊어져 있었다.        

  

이어서 내 글을 합평했다. 읽고 난 회원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신입회원의 첫 글이라 조심스럽기도 했을 거였다. 침묵을 깨고 한 회원이 말했다. 

         

“이런 분위기 수필은 처음이라서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 회원이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고 이윽고 선생님의 평이 있었다.      

    

“ 글이 급해, 격문(격식체)이 많아. 문학은 감동이 있어야 해.”   

       

20여 년 전 대학원에서 학위논문을 쓸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지도교수로부터 논문에서 수필투 문장이 많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 후 논증적 글쓰기를 하면서 감성 깊은 수필투 문장을 의도적으로 지워 버렸다. 논증적 글쓰기가 반복되면서 문학적 문체는 멀리 달아나 버렸다. 문체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문학적 감수성도 같이 달아나 버렸다.      

    

생각해보면 문학적 감수성은 ‘느림’과 ‘여유’에서 나오는 것 같다. 논증적 글쓰기를 하는 동안 나는 주장 하기 바빴다. 어떻게 하면 내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가에 집중했다. 독자가 머리로 이해한 내용이 나와 동일한 인식을 보여야 명징한 글이라 여겼다. 명징한 글은 최대한 수식 표현이 없는 단문이다. 단문은 수식 없이 뼈대만 있으니 핵심이 잘 보여 소통에 유리한 반면 호흡이 가쁘다. 이런 글쓰기는 감동보다 이성에 호소하는데 적합하다. 그러나 문학적 글쓰기는 달라야 한다. 읽는 이가 감동하도록 써야 한다. 감동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울림이다. 어떻게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있는가.


수필 문장은 논증적 문장과 달리 중의성을 지녀야 한다. 비유와 은유적 표현을 살려야 한다. 천천히 느낌이나 감정선을 표현하는 문장이어야 한다. 단정적 문투‘ ~해야 한다’, ‘~하는 것이다’, ‘~이어야 한다’ 등의 표현은 수필 문투가 아니다. 그러고보니 회원의 글을 합평할 때 많은 수식 표현‘이 내 눈에 거슬린 것처럼 내 논증하는 듯한 문투도 회원들에게 거슬렸을 터였다. 기존 보았던 수필 문체와 달리 딱딱하고 이성적인 내 글쓰기에 합평 회원들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이제 내 글쓰기 분위기를 엑스레이로 찍어보았으니 20여 년 전의 문학적 문투로 되돌려야 한다. 감성적 문체에서 논증적 문투로 바뀌었을 때처럼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이니 천천히 가보기로 한다. (22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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