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초등학생 딸은, 중학생 아들 보다 2학기
개학이 이틀 늦었다.
놀기에 바빠서 개학도 잊고 있었는데, 모녀에게 주어진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다. 딸은 母係로 이어지는 '떠남의 유전자'가 확실해서 비가 오려고 찡그리는 하늘도 아랑곳없었다.
하단에서 진해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가 한참 달리자, 유리를 타고 흐르는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다. 진해 어느 시장 앞에서 내렸다. 시장은 북적였고, 안쪽 식당에선 커다란 솥에서 국밥이 끓고 있었다. 비가 와서 따뜻한 소고기 국밥이 더 맛있었다. 길쭉하고 넓은 시장을 빙빙 돌다가 3시가 가까워 하단으로 오는 버스를 탔다. 지하철에서 졸던 딸은 꿈을 꾼 듯이
"오빠한테는 비밀이야."
라고 했다. 모녀는 비밀이 하나 생겼다.
우리 집은 남녀도 둘, 혈액형도 둘, 여행을 좋아하는 여자들과 여행을 싫어하는 남자들로 나뉜다. 여행을 가는 여자들은 갈 필요를 만들면 바로 실천이지만, 집에 남는 남자들은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집에서 먹는 음식은 그 무엇도 맛이 없었고, 갱년기 우울감과 두 팔에 골이 패일만큼 근육이 빠졌다. 힘도 없고 짜증만 났다. 사춘기인 아이들은 매사에 시큰둥했고, 남편도 힘든 시기였지만, 틈만 나면 방바닥과 한 몸이었다.
"매일 집밥만 먹기도 그렇고, 내일은 나가서 뭐 먹고 오면 어떨까?"
했더니, 말에 고물 묻을까 두려웠던 남편이
"역마살이 끼 갖고. 지가 나가고 싶으니,
아 ~들 핑계 댄다."
그 말이 방아쇠였다.
"뭐라고. 천지사방을 주름잡듯 싸돌아다닌 게 누군데, 나보고 아 ~ 들 핑계 댄다고~~~"
"니는 직장 생활 안 해봤나. 직장에 다닐라면 사람을 만나야지, 혼자 독불장군이가."
아무튼 직장 다닌다는 유세가 컸다. 보아하니 아들은 방에 콕 박혀있을 거고, 내일 외식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내가 집에 있는다고 누가 알아줄까. 나가서 조금 걷던지, 맛있는 걸 먹던지 할 생각으로 겉옷을 입자 딸이 따라나섰다. 그땐 지금처럼 카페가 많지 않았고, 버스정류소에 부산역으로 가는 버스가 왔다. 서너 구역을 지나면 부산역이라 목적지를 정해야 했다. 서울은 멀고 기차비도 만만찮아서 대전행 기차표를 샀다. 둘 다 말없이 대전역에 내렸는데, 밤 12시가 가까웠다. 밤의 대전역, 초행길에 갑자기 생각난 곳은 카이스트 였다. 아이들과 오고 싶었지만, 마음만 있던 곳이다. 택시를 타고 카이스트 정문 앞에 내렸더니, 철문 안에는 까만 밤이 가득했다. 부산과는 다른 기온이 추웠던지, 딸이 손을 꼭 잡았다. 모녀는 웃기는 상황에 마주 보고 웃다가 불빛이 환한 곳으로 걸어가니, 24 시간 불을 밝히는 맥도날드였다. 평소에 잘 먹지도 않던 세트 메뉴 2개를 시켜서 구석자리에 앉았다. 딸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우리는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근처에 시장이 있는지, 새벽부터 부산스러웠다. 5시가량 맥도날드에서 나와서 시장에 갔다. 활기 넘치는 시장을 구경하다가 어떤 건물에 있는 극장에서 <육혈포 강도단> 이란 영화를 봤다. 영화의 배경은 우리가 잘 아는 부산 중부경찰서 앞의 어느 은행이라, 부산을 못 벗어난다고 얼마나 웃었던지. 나이 든 세 자매가 힘들게 모은 돈으로 여행을 가려다 은행강도를 만나고, 좌충우돌하다 돈을 찾는다는 이야기였다. 영화를 보고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백화점에 가서 옷도 샀지만, 하늘은 깜깜해지지 않았다. 어제 대전역에서 밤늦게 부산으로 가는 기차표를 샀던 바보 엄마는 기차표를 바꾼다는 걸 몰랐다. 늦은 오후에 역 근처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동대구역을 지날 때 스친 생각은 '오늘이 아들의 생일'이었다. 물은 쏟겼지만,
두 남자는 전화가 없었다. 부산역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가자, 싱크대에는 짜장면과 다른 무얼 시켜 먹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남자는 기름진 것만 먹었던지, 눈이 퀭했다. 그날의 지출로 가계부에 빨간색이 도드라졌지만, 딸과 나는 환상적이고 삐걱거리는 여행메이트가 되었다.
새해를 맞아 딸이 부산으로 여행을 왔다.
딸은 할 말이 많았던지, 가까운 곳에 놀러 가자고 했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환승해서 찾아간 곳은 강서구 명지동의 진목이란 카페다.
다대포와 하단이 보이는 갯가 카페에는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비행기가 지나가는 걸 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 여인이 와서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생일 축하 노래에 이어서 부른 노래는 '오 솔레미오'였다. 정오를 조금 지나
태양이 눈부신 그곳에 있던 모두는, 서로에게
'나의 태양'이었다.
딸과 여러 곳을 다녔다. 딸은 사진에 민감해서 구도가 안 맞는다고 많이 투닥거렸다. 그럼에도
나는 딸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까칠한 딸은 엄마의 외연을 넓혀주는 멋진 여행메이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