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9시, 탁구장에서 오름부 언니와 만나기로 했다. 아직 문 열지 않은 탁구장에 불을 켜고 들어가는 기분을 우리는 예전부터 같이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의 만남은 이미 어젯밤에 계획된 거였다. 아침에 탁구장을 가야 하니 서둘러 아이들의 먹거리를 준비했다. 따뜻한 아침을 위해 압력밥솥에 쌀을 씻어 예약을 걸어두고, 구워 먹을 고기도 포스트잇에 적어서 냉장고에 넣었다. 가족들의 산뜻한 아침을 위해 밤사이 어질러진 거실도 식탁도 정갈하게 정리했다. 주말 아침, 곤히 자는 아이들의 얼굴을 못 보고 집을 나서는 미안함이 나를 더 움직이게 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서기 직전,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약속 시각이 당겨져서 아침 운동 못 가겠어요’ 탁구연습 후에 약속장소로 가려고 했는데 약속 시각이 당겨졌다는 거였다. 분주했던 몸과 마음이 ‘탁’ 하고 풀렸다. ‘갈까? 그냥 쉴까? 아침부터 너무 움직였나?’ 탁구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근처 카페로 옮겨졌다. 원기 회복에 특효는 깊고도 달콤 쌉싸름한 커피 내음이다. 카페는 나의 마음충전소다. 향기 한 모금에 가슴이 뻥 뚫리고 머리가 맑아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마음이 급속충전되자 나는 다시 탁구장으로 향했다.
탁구장에 불이 켜졌다. 누가 왔나? 발걸음이 빨라졌다. 누굴까? “언니! 왔어요? 같이 쳐요. 언니가 와서 4명 됐네요” 탁구장 문을 열자마자 동호회 동생이 반기며 말했다. 모두 실력이 우수한 상위레벨 회원이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연습이 시작됐다. 나의 파트너는 셋 중 제일 고수인 언니다. “공이 테이블에 떨어지자마자 치는 거 같아요. 올라오는 공을 보고 치면 좀 더 여유 있을 거예요” 고수 언니의 가르침에 그렇게 해보았다. 아주 잠시 공에 내어준 시선 덕분에 포핸드 랠리가 전보다 자유로워졌다. 나는 고수 언니의 조언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이렇게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건 분명 예전에 알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몸에 익지 않은 탓에 배우고 잊고, 배우고 잊고를 반복했으리라. 땅속 유물로 수천 년 전을 추정하듯 나는 나의 동작 하나에서 배움의 타임라인을 쫓고 있었다.
나는 몇 년째 초보 그룹인 9부에서 8부로의 레벨업을 희망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 누가 그냥 8부로 승급시켜준다고 한다고 해도 나는 자신이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숫자가 아니라 진짜 실력이니까. 실력이 되면 레벨업은 자연히 따라오는 수순이라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배우고 잊고의 반복이 벌써 몇 년째인가. 여전히 발은 굳어 있고, 공이 뜨면 무조건 때리는 조건반사적 플레이를 나는 여전히 하고 있다.
“공을 치고 자리에 멈춰 있지 말고 발을 가볍게 조금만 움직여 보세요. 그래야 옆으로 공이 올 때 움직일 수 있어요” 연습에서도 오래된 장승처럼 굳어 있는 나를 보며 고수 언니가 차분히 조언했다. 역시 모르는 바 아니다. 하려고 해야 한다. 내 몸에 붙어 있는 내 발이 아닌가. “네, 맞아요. 해볼게요” 어느새 나는 그녀의 빠른 공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넘기고 있었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했던 거였나? 진작에 이렇게 움직였어야지. “제가 오늘 귀인을 만난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그녀는 멋쩍어했지만, 나는 신문 한쪽의 ‘오늘의 운세’에나 나올법한 귀인을 만난 듯 깍듯이 인사했다.
나는 40대에 탁구를 시작했다. 누구는 40대여서 좋겠다고 말하고, 누구는 조금 일찍 시작하지 그랬냐고 했다. ‘설마 내가 50세까지 초보일까?’라고 생각했던 게 그때 마음이었다. 내년이면 앞자리가 바뀐다. 한 해, 한 해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드디어 마지막 해에 도달했다. 40대의 나는 50대의 내가 기대됐다. 멋지게 탁구 치는 나, 마음먹은 대로 글을 술술 써 내려가는 나, 조금 더 성숙해진 마음으로 사람들을 품는 나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방향을 잃지는 않았는데 기대했던 50대의 나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면 개미만 한 뒷모습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먼 훗날 웃으며 이야기할 그날을 또 기대한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 오늘의 ‘귀인’만 있던가, 탁구장에 있는 모든 회원이 나에게 귀인인 것을. 늘 나를 지켜보고 나만큼이나 내가 잘하기를 바라는 회원들이다. 많은 사람의 기운을 다시 한 몸에 받아 넣어본다. 그리고 내가 언젠가 그들의 귀인이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