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라 Jul 02. 2022

"1승? 그럴리가요"

탁구 이야기


라켓 잡은 오른팔이 앞으로 뻗지 못하고 자꾸만 몸쪽으로 말린다. 당연히 공은 앞이 아니라 옆으로 날아간다. 몸의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 왼팔은 마네킹처럼 몸에 딱 붙어있다. 다음 주 ‘제주특별자치도탁구협회 전도종별 탁구대회’가 열리는데 이런 상태라면 내 경기는 안 봐도 뻔하다.

“내일 태윤 탁구장에서 리그전 열리는데 한 번 가보세요. 이번 대회에도 도움 될 거에요” 친한 동생의 말에 바로 신청했다. 다음날이다. 처음 가보는 낯선 탁구장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개별신청이라 누가 신청했는지 사전에 알 수 없기에 더 반가웠다.


우리 조에서 하위부수인 9부는 나 혼자다. 첫 경기 상대는 8부 남자회원이다. 그의 시원스러운 공에 맥을 못 췄다. 긴장 속에 서브 실수까지 더해지니 경기는 쉽게 끝났다. 두 번째 경기다. 이번엔 7부 남자회원이다. 단번에 내 수준을 알았는지 공격은 하지 않고 수비만 한다. 그래도 점수는 잘도 먹는다.


이제 세 번째 경기다. 상대는 8부 남자다. 응원 온 구장회원 몇 명이 내 등 뒤에 코치진처럼 앉았다. 응원에 힘입어 마음속 ‘자신감’을 외쳤다. 나의 유일한 서브인 커트 서브를 넣었다. 공은 상대 테이블에 살짝 뜨게 들어갔다. 상대는 바로 때렸다. 다행히 공은 네트에 걸려 상대 테이블로 떨어졌다. 나의 1득점이다.

상대의 실수였지만 나의 서브가 먹힌 거다. 최대한 공에 힘을 실어 서브했다. 상대의 공격은 다시 걸렸다. ‘이러다 이기겠는데!’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잠시라도 공을 놓칠세라 상대 라켓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긴장한 탓에 입은 말랐고 숨을 고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등 한가운데로 땀이 물줄기처럼 흘러내렸다. 느린 운동신경에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이지만 어디든 공을 쫓아가고 싶었다. 혼돈의 1세트가 끝났다. 내가 이겼다. 2세트 시작이다. 상대가 내 공을 파악했는지 초반부터 점수가 앞섰다. 부지런히 쫓아갔지만 11점을 받기는 이미 늦었다.


3세트다. 상대도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나도 쉬운 상대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내 속에선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음속 주문을 외웠다. ‘자신 있게! 자신 있게!’ 난 주문에 홀린 듯 연속 두 세트를 내리 이겼고 3대 1로 승리했다.


2019년 처음 탁구장을 기웃거린 후 첫 승리다. 운동이라곤 해본 적 없는 내가 탁구장 문을 두드리고 레슨 받은 지 몇 년인가. 속상하고 답답했던 많은 기억이 순간 다 걷힌 기분이다. 유치원 아이처럼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누군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는 걸 알고서야 나는 멈췄다.


경기장 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평상시 탁구장에서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인사하던 같은 동호회 회원이다. 탁구고수이기도 했지만 근엄한 표정과 나직한 목소리, 외모에서 풍기는 강한 인상에 말 걸기 어려운 회원 이었다. 그는 점점 내 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색함도 잊은 채 콩닥콩닥 뛰는 마음에 그에게 성큼 다가갔다.


“회원님! 저 경기 1승 했어요. 그것도 8부 남자회원이랑요!”

아빠에게 100점 시험지를 자랑하듯 내 목소리는 한껏 높았다.

근엄한 회원은 나직이 답했다.

“그럴리가요!”

"정말이에요. 3대 1로 제가 이겼어요" 목소리엔 힘이 들어갔다.

“도대체 회원님한테 진 그 사람이 누구예요?”

나는 몸을 돌려 저쪽에 앉아 있는 상대의 인상착의를 빠르게 설명했다. 혹여나 그가 자신을 보는걸 눈치챌까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잘했네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하게 느린 습득력과 로봇 같은 리듬감을 가진 나다. 그는 진정 나의 승리를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5월 15일이 사람들에겐 스승의 날이겠지만 나에게 2022년 5월 15일은 내 생에 첫 승의 날로 기억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날 차버린 그들이 내 앞에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