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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라 Jun 25. 2022

날 차버린 그들이 내 앞에 있다

지난 3월, 사무실 직원의 추천으로 직장 탁구동호회에 들었다. 함께 하고 싶다는 말에 흔쾌히 동호회 회원이 되었다.      


동호회는 토, 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개인 탁구장을 대여해서 운영된다. 신규 동호인을 상위부수 동호인이 돌아가며 가르쳐 주는 멘토멘티제도 있었다. 기존 동호인 한 명이 나의 3월 멘토로 지정됐다. 어색한 인사로 1대 1 플레이를 시작했다. 탁구대 왼편으로 공을 보내라고 한다. 제멋대로인 내 공들은 오른편, 왼편 할 것 없이 마구 떨어졌다. 멘토 동호인은 천방지축 내 공들을 잘도 받아넘겼다. 침묵 속 어색함은 채 십 분이 지나지 않아 등줄기에 흐르는 땀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멘토 동호인은 연습을 위해 20분 정도 일찍 오라고 했다. 온통 탁구 생각뿐인 내게 그 정도의 시간은 문제가 아니다. 흔쾌히 주말 아침에도 출근하듯 동호회 탁구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오기 전 이삼 십분 멘토와 연습하고 다른 동호인들이 오면 그들과 함께했다. 놀이터에서 처음 만나 금세 친해지는 아이처럼 탁구장에서 난 동호회 사람들과 즐기며 웃고 있었다. 새로움은 낯설고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그 뒤에는 색다른 활력이 기다리고 있다. 청명한 하늘, 몽실몽실 흰 구름 같은 기분을 난 만끽하고 있었다.     


처음 직장 동호회를 들려고 했던 건 몇 년 전이다. 그땐 생각보다 까다로웠던 동호회 가입에 상처만 받고 돌아섰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까다로웠던 그곳은 직장 동호회가 아닌 직장 산하기관에서 운영됐던 탁구 동아리였다. ‘내가 그때 동아리가 아닌 지금의 직장 동호회에 들었다면 어땠을까?’ 엉뚱하게도 난 동아리가 직장 탁구 동호회인 줄 알았다. 이제 와 아쉬움이 남지만 다 지난 일이었다.     


동호회에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원 간 친선경기가 열렸다. 경기는 우리 팀, 상대 팀 구별 없이 서로가 심판이 되기도 하고 코치가 되기도 했다. 멋진 공격에 환호하고 아슬아슬 받아넘긴 공에 탄성을 지르며 사람들은 모두 원팀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함성과 구호 소리에 사람들의 에너지가 그대로 담겨있었다. 소박한 시상식이 끝나고 점심 일정이 잡혀있었다. 주중에 미뤄둔 일들로 토요일 오후 일정이 빠듯했지만, 동호회 사람들과 처음인 식사 자리라 잠시라도 함께하고 싶었다.      


점심 장소에 도착했을 때 생각보다 동호인들은 많지 않았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몇 년 전 내가 들려 했던 동아리 총무와 멘토 동호인이 있었다. 직장 동호회에 들어와 보니 동아리 총무였던 그 친구도 동호회원이었다. 동아리 가입이 좌절된 사건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라 직장 동호회에서 마주쳤을 때 서먹할 것도 없었다. 다만 서로가 그 일에 대해 말을 아꼈다. 우리는 가운데 놓인 김치찌개가 끓기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동호회에서 만난 그 친구도, 몇 번 함께 하지 않은 멘토도 그 순간은 예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편안하고 익숙했다.     


탁구 이야기로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잠시 숨 고르는 사이 멘토 동호인이 말했다. “나, 아니우다. 그때 그거 나가 한 거 아니마씨.”, ‘내가 아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밥 먹다 말고 뜬금없는 말이다. ‘그때 그거라니’ 마치 나를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그의 말도 이상했다. “혹시 저를 아세요? 저는 회원님 여기서 처음 보는데. 뭐가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내가 물었다. 멘토 동호인은 대답을 멈추고 예전 동아리 총무를 쳐다봤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 친구 입에서 짧은 대답이 나왔다. “이 사람이 그때 회장이야. 그때 있잖아”     


순간 시간이 멈춘듯했다. 내 앞에 있는 그들이 그들이다. 정지된 시간이 풀렸을 때 동아리 총무는 멘토 동호인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왜 그때 그렇게 해서” 멘토 동호인이 대꾸했다.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내가 언제 자기소개서 내라고 했냐? 네가 한 거 아니냐.” 두 사람은 계속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하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금 그들은 내 앞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난 왜 그들과 함께 앉아 있을까.’ 불편한 상황에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깊게 심호흡했다. 내 머리는 잘잘못을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라고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그만하지요. 진실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일을 이제 와 서로 탓한다는데 의미 없는 거 같네요. 두 분 얘기 잘 들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으로 하지요.” 내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날의 침묵은 동의의 다른 표현이었다.     


김치찌개는 계속 끓고 있었다. 맛도 모양도 익숙한 찌개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묵묵히 밥 한 그릇을 입에 담아 넣었다.     


‘처음부터 그들이 직장 동호회에 있다는 걸 알았다면 어땠을까?’ 소심하고 자존심 강한 나다. 직장에서 탁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언제까지 마음속 응어리를 가지고 살 수는 없다. 개인적 감정이 아니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 두껍게 쌓인 먼지를 걷어낸 기분이다. 이제 몽실몽실한 구름처럼 가벼워질 기회다. 그들이 어떤 인연이 될지는 내가 정한다. 연둣빛 봄날 같은 나의 탁구 사랑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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