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협회장기나 제주도지사기 대회와 달리 민간기업이 후원하는 제1회 대회라 상품이 남달랐다. 하위부수인 9부부터 상위 1부, 선수부까지 그룹별로 우승자에게는 황금열쇠 한 돈에서 다섯 돈까지 주어지고, 경품 또한 공기청정기, 압력밥솥, 청소기, 인덕션 등 여느 탁구대회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었다. 지금까지 없던 통큰 대회 공지에 구장에서는 황금열쇠를 받아 동호회 회식을 해보자는 이야기도 나왔고, 제일 하위부수인 오름부가 황금열쇠를 받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냐는 다소 신빙성 없는 의견도 나왔다. 어쨌든 우리 동호회에서는 첫날 치러진 하위부 대회에 금강부 그룹인 7, 8부에서 4명, 오름부 그룹인 9부에서 3명 총 7명이 참가했다.
목요일 아침부터 몸살기가 있더니 대회 전날인 금요일에는 연습도 못 갈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 오름부 경기는 다행히 오후 3시다. 아침 일찍 병원에서 주사 처방을 받았다. 급한 대로 콧물도 잠재우고 정신도 들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병원에 들렀건 들리지 않았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란 사실이다.
첫 경기 3대 0, 두 번째 경기 3대 0, 깔끔하게 졌다. 게임이라는 게 5세트까지는 못 가더라도 점수를 뺏고 뺏기는 짜릿함과 긴장감이 있어야 제맛인데, 식은 붕어빵처럼 찌그러져 흐느적거리다 졌다. 컨디션의 문제랄 것 없이, 실력이었다.
나머지 오름부 회원 두 명은 생동감 있는 경기를 했지만 아쉽게 순위에 들지는 못했다. 토너먼트가 이어졌고 드디어 결승전이 시작됐다. 한 명은 처음 보는 젊은 회원이었고 다른 한 명은 예전에 본 적 있는 연륜 있는 회원이었다. 두 구장 사람들 간 응원이 시작됐다. 난 젊은 회원의 군더더기 없는 풋워크와 몸놀림에 감탄만 연발하고 있었다. ‘오름부 맞아?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지. 공을 볼 줄 아는구나!’ 내가 깡충깡충 유치원 풋워크를 하고 있다면 그녀는 어른의 보폭으로 제대로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숨죽여 결승전을 지켜보는 가운데 경기는 5세트까지 이어졌다. 한 점씩 올라갈 때마다 대회장 천장이 뚫릴 듯한 환호가 이어졌다. 함성과 아쉬움이 뒤섞이며 최종 우승의 황금열쇠는 파워 탁구를 구사한 젊은 회원에게 돌아갔다. ‘진정 그녀가 오름부 인가!’
넋 놓고 지켜보던 결승전이 끝나자, 무겁고 어두운 무언가 내 안으로 훅 들어왔다. ‘내가 과연 최하위 부수인 오름부를 벗어날 수 있을까?’ 열심히 하면 2~3년 뒤에는 가능할 거란 기대를 해보지만, 시간과 실력이 비례한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 앞이 까마득해졌다. 왜 굳이 안 나가도 되는 이런 대회에 와서 자책하는지…. 답 없는 고민이 깊어졌다. ‘실력이 될 때까지 대회에 나가지 말자.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데 이런 기분 느껴 내게 좋을 게 없어.’
시상식이 시작됐다. 동호회 참가자 7명 중 유일한 남자회원이 금강부 우승을 차지해 황금열쇠를 받았다. 남은 건 경품 추첨이다. 주인을 기다리는 큼지막한 박스와 온갖 탁구용품들이 시상대 위에 가득했다. 한림탁구, 남원청우, 연동탁구, 핑퐁탁구, 제주탁구, 고현우탁구 등 여러 동호회 사람들이 계속해서 불렸다. 서른 명은 족히 넘었을 법한데 우리 동호회 회원은 한 명도 호명되지 않았다.
“우리 동호회 명단 빠진 거 아니에요?” 누군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명이 불렸다. ‘한정영탁구 이00’ 온누리상품권 3만 원. 들썩이기 시작했다. “우와!, 명단 있나 봐요” 동호회 이름이 나왔다는 사실에 다들 신이 났다. 잠시 후 또 한 명의 당첨자가 등장했다. ‘한정영탁구 김00’ 이번엔 믹서기였다. “언니들! 우리 이름 전부 부를 거니까 다들 일어나서 준비하세요!” 구장 동생의 장난 섞인 말에 경기장 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추첨은 계속됐고 서로 갖고 싶은 품목을 이야기하며 주문을 외고 있었다. ‘한정영탁구 홍00’, 주문이 통했던 걸까, 그녀는 에어프라이기에 당첨됐다. 여자 여섯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우리의 울림이 제자리를 찾기도 전에 또 한 명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는 당당히 30만 원 상당의 쿠쿠 압력밥솥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일어나 준비하라는 말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여자 여섯 중 남은 사람은 두 명. ‘설마, 이번에는 나일까?’ 정말 나였다. 난 방실방실 웃으며 발걸음 가볍게 사뿐히 시상대로 날아가고 있었다. 여섯 명 중 다섯 명이 모두 경품에 당첨되는 엄청난 행운에 다들 오늘의 패배는 잊은 듯했다. 두 마리 행운을 다 잡기는 어려웠는지 황금열쇠를 받은 남자 회원은 마지막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앞으로 대회는 나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게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나는 큼지막한 청소기를 받아 들고 한껏 미소 지으며 시상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진실로 나였다. 경품은 다운된 기분도 춤추게 하나 보다. 그렇다. 앞으로도 대회는 나가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