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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라 Apr 01. 2023

라켓으로 날려버린 '한숨의 추억'

책상 앞을 꽉 채운 책들 위로 탁상 달력이 놓여있다. 달력에는 귀여운 반짝이 하트 스티커가 붙어 있다. 레슨 받은 날이다. 3월부터 관장 레슨을 시작했다. 내가 관장 레슨을 받은 건 2019년 3월 라켓을 처음 잡으면서다. 운동도 처음이고 탁구는 더더욱 처음이라 라켓 잡는 법부터 기본 포핸드 동작 하나하나 관장 설명에 의지하며 배웠다. 문제는 몇 회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분명히 팔은 뻗었는데 뻗은 게 아니었고, 올린 거 같은데 올린 게 아니었다. 내 생각대로 내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3개월이면 기본자세는 나오겠지.’라고 생각하다 결국 버틴 1년, 탁구장에 떡을 돌렸다. 친절한 구장 회원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준비한 떡이지만 사실 미련스러울 만큼 꾸준히 1년을 버틴 나를 위한 떡이었다. 선수 같은 유니폼을 입고 빠른 공을 이리저리 넘기며 랠리를 이어가는 회원들을 볼 때마다 ‘난 안 돼!’라는 마음을 꾸욱 눌러가며 지낸 1년이었다. 말이 1년이지 내 동작은 처음과 별 차이가 없었다. 사람과 함께 하는 날보다 기계연습만 하다 돌아가는 날들이 더 많았으니까. 


레슨받던 모든 날이 그랬듯 동작을 따라 하다 ‘왜 안 돼!’라며 자책하던 어느 날, 돌아서며 깊은숨을 쉬는 관장을 보았다. 한숨이었다. 한숨의 의미는 뭘까. 화가 난 걸까?, 답답한 걸까?, 그냥 감정을 추스르기 위함일까. 


한숨의 파장은 지구 반대편까지 연결됐을 것 같은 구덩이 속으로 내 마음을 밀어버렸다. 너무 깊어 더는 마음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 다녀야 하나, 이게 맞는 걸까, 아무래도 탁구는 아닌 거 같아,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니?’     

그날 이후 나의 마음은 불편함이 섞인 채 단단하고 옹졸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가 터졌고 직장에서는 체육시설 이용을 자제하라는 권고가 나왔다. 자연스레 탁구장에 가는 일이 줄었고, 탁구 레슨도 멈췄다.     


일 년 반 정도 지나 코로나 규제가 서서히 풀릴 때쯤 용기 내어 다시 탁구장으로 돌아왔다. 레슨은 관장 사모인 코치에게 새롭게 받기 시작했다. 레슨 시간이 안 맞아 시간 여유가 있는 코치에게 받는다는 게 이유였지만 사실은 관장에게 레슨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나를 깊은 구덩이로 밀어버렸던 ‘한숨의 추억’ 만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동작이 나올 때마다 짧고 단호하게 힘주어 나의 이름을 부르는 울림이 들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00 회원님!, 00 회원님!”    

 

작년 한 해 바쁜 업무 일정에도 탁구 레슨은 거르지 않았고, 같은 하위부수인 9부 회원들과도 꾸준히 쳤다. ‘이제쯤이면 관장 설명을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코치가 말하는 동작도 따라 하는데 관장 동작도 따라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다시 관장 레슨을 받아보고 싶어졌다.


“관장님, 3월부터 관장님한테 레슨을 받았으면 하는데요. 3월에 근무처가 바뀔 거 같은데 바뀌면 관장님 레슨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거 같아요.”

“왜 잘하고 계시는데 바꾸시려고요. 코치랑 잘하고 있잖아요. 예전보다 움직임도 좋아진 거 같고 코치랑도 잘 맞는 거 같은데요.” 코치랑 안 맞는 것도, 시간이 안 맞은 것도 아니었다. 난 ‘한숨의 기억’을 바꾸고 싶었다.

“물론 코치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지만 움직임이 나아진 건 레슨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거 같아요. 그동안 시간이 흘렀고 연습도 계속하고 있으니까요. ”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난,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말할 필요가 있었다.

“제가 관장님 레슨을 다시 받고 싶은 건 예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설명을 이제는 알아들을 수 있을 거 같아서예요. 다시 설명을 들어보려고요”

“그게 이유라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3월, 관장과의 레슨이 시작됐다. 봄날의 설렘처럼 레슨이 끝나면 빨강 하트 스티커를 달력에 붙인다. 그리고 이해가 되건 안되건 그날의 말들을 기록으로 남긴다. ‘이해’라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뇌과학자 박문호 박사는 이해하기 어려울 땐 일단 이해를 보류하고 근육을 먼저 사용하라고 한다. 그러면 나중에 근육이 알아버리고 이해는 오게 된다고. 이해는 하는 것이 아니고, 오는 것이라고.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이해가 나에게 오는 그날까지. 반복은 사랑이고, 반복은 힘이 세고, 반복은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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