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 이야기
2019년 1월, 드디어 2년 반 만에 서귀포시에서 집 근처 제주시로 발령이 났다. 출퇴근 시간은 2시간에서 40분으로 1시간 20분이나 줄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새로운 업무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잊고 있던 탁구 관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집 근처 탁구장이 생긴 걸 본 지도 몇 년, 그 앞을 오간 지도 몇 년, 이제쯤 한 번 들어가 볼 만도 했다.
탁구장을 처음 방문한 건 지난 겨울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딸아이와 함께 갔었다. 그때쯤 머릿속에 탁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3년 전 근무지에선 점심시간마다 동료들이 낡은 탁구대에서 조그마한 공을 똑딱똑딱 치곤 했다. 서로 웃으며 응원할 때 점수판을 넘기며 구경하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난 학창시절 그 어떤 시간보다 체육 시간을 싫어했다. 혹여 피구경기를 할 때면 내심 얼른 공을 맞고 아웃 돼서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공이 커서 무서웠을까, 공 맞을 때 아파서 그랬을까, 공을 이리저리 피해야 하는 공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난 모든 게 무섭고 싫었다. 동료들은 손바닥 크기의 라켓으로 한 손에 오목 잡힐만한 작고 하얀 공을 치고 있었다. 그 공은 가볍고 귀여웠다.
며칠 망설이다 저녁 설거지까지 끝낸 후 ‘그래! 가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날의 밤8시, 밖은 컴컴했다. 그 시간에는 탁구장에서 조용히 상담받을 수 있을 거 같았다. 혼자 갈까 망설이다 5학년 딸아이에게 탁구장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나 탁구 안 할 거야.” 엄마가 탁구레슨을 시키려 한다고 생각한 딸은 단번에 거절했다. 절대 아니라고, 엄마가 알아보러 가는 거라며 다시 부탁했다.
서둘러 겉옷을 단단히 챙겨입고 아이와 함께 탁구장으로 향했다. 싸늘한 바람 소리뿐 주택가는 조용했지만, 탁구장에 가까워질수록 왠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탁구장에 도착했다. 입구 문을 열었을 때 두꺼운 오리털 점퍼를 입은 나는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한낮에 눈 부신 태양보다 더 밝은 조명이 비치고 있었다. 그곳은 어두운 밤 속 가장 환한 낮이었다. 사람들은 TV 속 선수들처럼 반소매에 반바지를 입고 탁구대 앞에서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나의 착오였다. 탁구장의 저녁 8시는 직장인들이 퇴근 후 취미를 즐기러 오는 가장 뜨겁고 열정적인 시간이었다. 쭈뼛거리며 두리번거려도 아무도 눈길 주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작은 공에 열중해 있는 듯했다. “엄마, 가자!” 딸이 내 옷을 당기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몇 년을 망설이다 방문한 탁구장이었지만 이미 내 마음은 뒷걸음쳐 저만치 도망간 뒤였다. ‘다들 너무 잘 치는데, 선수들만 있나, 이 나이에 가능할까?, 당연히 안되지’ 마음속 외침에 몸을 돌릴 때쯤 저 안쪽에서 누군가 나왔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레슨은 어떻게 하는가 해서요” 떨리는 속내를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그는 벽에 붙은 레슨 시간표와 요금표를 가리켰다. “누가 받을 건가요?” 찰나의 기다림도 없이 바로 내 손가락이 옆에 있는 딸아이를 가리켰다. “애요” 딸아이는 갑작스러운 엄마의 말에 토끼 눈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이내 딸애의 일정을 확인하고 가능하면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서둘러 탁구장을 나왔다.
첫 방문 이후 5개월이 지났다. 집 근처로 발령이 났고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무엇보다 해보고픈 마음을 뒤로하고 시도조차 않은 것을 합리화할 내 모습이 그려졌다. 미래의 어느 날, 또다시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라게 가장 큰 이유였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매번 내 선택은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맡긴 듯 소극적이었다.
일찍 퇴근한 날 결심을 하고 혼자 탁구장에 들어갔다. 아직 퇴근 시간이 아니어서 탁구장은 겨울날의 그때와 달리 한 테이블 정도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지난번 봤던 이가 다시 나왔다. 관장이었다. 탁구장 내부도 지난번과는 다르게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최대한 사람이 없는 가장 이른 시간에 레슨을 잡았다. 동작을 배워도 몸이 따라가지 못할 것을 알기에 지레 부끄러웠다. 누구나 어색한 초보 시절은 있지만 난 아니고 싶었다. 그 순간은 완벽주의자가 된 것처럼 서툰 내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6개월 정도 레슨 받으면 괜찮아질 거야.’ 마음이 바뀌기 전에 등록했다. 탁린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