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내 주위에 가장 남자들이 많았던 해였다. 그것도 양팔 정도의 거리 안에 그들은 존재했다. 이름하여 탁구장 백두부 회원들. 구장 막내 부수가 오름부다 보니 바로 위에 금강부, 그 위 한라부, 최상위 그룹인 백두부 회원들은 늘 우리가 연습하는 걸 지켜본다. 그중에서 특히 백두부 남자 셋은 단연코 우리 오름부의 멘토다.
남자 1호. 자칭 자신은 지구인이 아니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라켓 손잡이는 이상하다. 손잡이에 코르크를 붙이고 찰흙을 덧대 매끈한 손잡이가 울퉁불퉁하다. 손 근육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손잡이 부분을 개조했다는데 요상하게 생긴 것이 여느 라켓과 다르다. 그는 가끔, 이상한 용품을 선보이며 회원들을 현혹하기도 한다. 이름하여 ‘착시 머리띠’와 ‘절대반지’다. 검은색 머리띠에 탁구공 5개를 스프링으로 연결해 만든 착시 머리띠는 ‘흘러내리는 잔머리를 고정함과 동시에 상대방의 착시현상을 유도할 수 있다’고 홍보한다. 탁구공에 링을 달아 손가락에 끼울 수 있게 만든 ‘절대반지’ 역시 경기도중 손을 살짝만 움직여도 상대 선수의 동공 지진을 느낄 수 있는 비장의 무기라고 말한다. 이 두 가지를 지닌다면 선수급인 관장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지만 그는 아직 관장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를 외치며 탁구를 친다.
매사에 재밌고 유쾌한 그지만 탁구 앞에선 진지하다. 주말, 오름부 세 명을 모아두고 원 포인트 가르침을 준다. 공을 치기 위해선 적어도 10가지가 넘는 기본동작이 있다고 한다. 팔 스윙 앞으로 뻗기, 오른 다리 눌러주며 공 잡기, 왼다리로 중심이동하면서 눌러주기 등등. 하지만 공을 보기에도 짧은 시간에 10개 동작을 생각하면서 공을 칠 수는 없다. 기본 루틴은 자동화해 놓고 상황에 맞는 박자와 스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브 넣고 준비! 착! 착! 착!’ 그는 말한다. ‘준비는 빠르게, 공은 천천히’. 한 명씩 동작을 따라 해 본다. 이렇게 가르침을 주다가도 아내와의 약속 시각이 되면 “다음번에”라는 말을 남기고 지체 없이 가방을 챙기고 구장을 떠난다. ‘아내 말씀에 착! 착! 착!’ 이것도 그의 기본 루틴인가 보다.
남자 2호. 그는 참 체력이 좋다 못해 끈질기다. 오름부 회원을 한 명씩 가르쳐 주다가 ‘마지막 5개’를 외치며 공이 잘 들어갈 때까지 계속한다. 도대체 그 5개는 줄어들 줄 모른다. 겨우 5개를 성공하면 다른 동작 연습으로 들어간다. 끝난 게 끝난 게 아니다. 시작 자세는 낮았지만 어느새 서있는 나를 보며 “자세만 낮추면 다 들어가요”를 무한 반복한다. 그는 우리의 탁구 스타일도 잘 파악한다. 게임하는 것을 살짝만 스캔해도 뭐가 문제인지 바로 짚어낸다. AI 분석력을 가진 듯하다. 문제점 해결을 위한 개인별 맞춤형 특훈도 흔쾌히 해준다. 그는 항상 ‘오름부 최강’을 외친다. 경기 결과가 어찌 됐든, 우리가 뭘 하든 늘 잘하고 있다고 한다. 진짜 잘하고 있는 건지 살짝 헷갈리지만, 그의 말을 믿게 된다. 그의 눈에 우리는 칭찬으로 키워야 할 새싹 같다. 탁구 앞에선 냉정한 관찰력을 가졌지만, 아내의 생일날 휴가를 내고, 늦은 시간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맥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그다. 맥주에 안주도 많이 먹는지 살짝 눈에 띄게 배가 나왔다. 남자 2호를 보고 있으면 야식과 탁구 실력의 상관관계는 없는 게 분명하다.
마지막 남자 3호. 나보다도 몸무게가 덜 나갈 것 같은 군살 하나 없는 그가 참 부럽다. 밤 10시가 넘어서도 살이 빠질까 일부러 챙겨 먹는다는 그다. 그가 즐겨 마시는 노란색 맥심 봉지 커피도 그의 체중 유지에 한몫한다. 구장에서 연습하다가도 독감에 걸린 아내와 딸을 위해 살뜰히 저녁을 준비하고 다시 구장으로 나온다. 다정함은 구장에서도 변함없다. 우리끼리 엉뚱한 자세로 스윙연습을 하고 있으면 살며시 다가와 자세를 교정해 준다. 상대 공을 마구 쳐서 날려버리는 나에게 말한다. “라켓을 글러브라고 생각해 보세요. 공 잡을 때 글러브로 따라가다 잡잖아요. 그렇게 공 가까이에서 보고 치세요. 다리가 가는 건 기본이고요.”. 민공, 너클공, 커트공 등 탁구 이론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 애쓴다. 한창 설명하다 한 마디 툭 던진다. “공 구질별 리시브 스윙을 배워도 정작 어떤 공이 날아오는지 모르면 다 소용없어요. 아시죠? 먼저 공을 볼 줄 알아야 해요.” 정답이다. 그런데 어째 나는 아직 까막눈이다. 공을 보는 찰나의 집중력도 바닥이다. 하지만 괜찮다. 일단 스윙법은 배우고 있으니 순서가 어찌 됐든 이제 공만 볼 줄 알면 된다.
매너 좋고 깔끔하고 명쾌한 백두부 남자 셋. 일, 가정, 취미 3박자 리듬은 기본, 배려심 가득한 인성까지. 그들의 리듬과 균형감이 부럽다.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 것일까? 따스하고 친절한 매너의 출발은 탁구 실력인가.
주는 것보다 받은 게 더 많았던 2023년이다. 내가 받은 설렘과 열정의 선물 꾸러미를 2024년에는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길 바란다. 내가 먼저 말 걸었던 탁구가 내게 조잘거리며 말을 걸어오는 그런 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