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가 심상치 않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 살짝 이상하더니 나도 모르게 허리를 구부렸다. 꼬리뼈 근처가 아프다. 허리가 불편하니 걸음걸이도 어제와 다르다. 넘어진 적도 다친 적도 없는데 허리가 무슨 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일까. 다음 주에 제주도 종별탁구대회도 있는데.
정형외과로 갔다. 의사 선생님은 염증은 보이지 않지만, 척추 4번과 5번이 가까워 염려된다고 했다. 우선 진통제를 먹고 좀 쉬어보라는 처방을 내렸다. 아! 다음 주부터 5일간 휴가를 잡아뒀는데. 앞뒤 공휴일과 대체휴일까지 끼면 열흘이다. 만일 열흘간 가만히 누워서 지내야 한다면 그게 ‘병가’지 무슨 ‘휴가’인가. 이런 망할! 어제까지만 해도 ‘열흘간 탁구장은 매일 가야 해, 오전에 가서 서브 연습하고 저녁에는 평상시처럼 레슨을 받고. 낮에 3시간 정도는 책을 읽고, 한두 시간은 글도 쓰고. 나머지 시간은 집안 곳곳을 한 부분씩 정리해야지. 그동안 못 봤던 친구들에게도 미리 연락해야지. 하루 정도는 혼자 드라이브하면서 맛난 거 먹고 여유를 즐겨야겠다.’ 이런 소박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리치료를 받고 약도 먹으니 통증은 나아졌지만, 머리는 복잡했다.
“엄마, 아빠 여수 가려고 한다. 너 휴가라는데 같이 갈 수 있으면 가고.” 전에 내가 열흘간 쉴 거라고 말했던 걸 엄마는 놓치지 않으셨다. 전주에 사는 둘째 여동생이 친정 부모님께 여수로 나들이를 권한 터였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탁구대회도 준비해야하고, 곧 아이들 시험 기간 이어서 못 간다는 말이 나와야 하지만, 왠지 통증은 사라졌어도 운동은 좀 쉬어야 할 거 같았다. 탁구도 못 치는데 그럼 나도 가볼까 “저도 갈게요” 신랑에게 아이들을 챙겨달라는 양해를 구하고 부모님과 막내 여동생의 여행에 동참했다. 둘째는 여수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결혼 후 아이들 없이 부모님과 여행을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제주에서 비행기 이륙 후 30분이면 도착한다는 여수공항에 도착했다. 이리 가까울 수가. 한여름 같은 찐한 햇살을 받으며 우리는 동백꽃으로 유명한 오동도 걸어 들어갔다. 4월 초록빛 숲으로 변한 동백섬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마치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처럼 동생과 난 부모님에게 초등학생 자녀가 되어 버렸다. “모자 써야지, 잠바는 벗는 게 낫겠다.” “그쪽으로 내려가지 말고, 조심히 이쪽으로 와” “물 마셔야지, 뛰지 말고” 80세의 아버지와 75세의 어머니는 40대의 세 딸을 어린아이 대하듯 하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간식을 사대는 딸들. 사놓고 살찐다고 서로 권하는 우리. 이렇게 먹으면 밥은 어떻게 먹을 거냐는 엄마. 아이고 아이들이 말들이 많다며 웃어대는 아빠.
둘째 날 호텔에 체크인했을 때 막내가 말했다. “루프톱에서 온수 수영할 수 있데요.” ‘그래서 뭐!’ 수영도 못하거니와 물을 무서워하는 난 온수건 냉수건 수영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때 막내의 말에 제일 먼저 대답한 사람은 아빠였다. “그럼 수영하러 가자!” “네? 수영복은요?” 내가 말했다. “여행에 수영복은 기본이지. 엄마 거랑 내 거는 챙겨왔어. 언니는 빌려서 입으면 될 거야” 막내의 우쭐한 대답에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우리 가족은 몇 시에 루프톱에서 만날지 얘기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족은 수영장을 횡보했다. 우리까지 3가족이 전부였다.
“엄마! 나 수영 못하는데요” “이런, 왜 네가 수영을 못하니?” 엄마의 말에 옆에서 수영하던 아빠도 거들었다. “아빠, 엄마가 수영을 잘하는데 너는 왜 못하니?” “엄마가 수영 학원 안 보내줬잖아요” 나의 어리광 섞인 대답에 수영장 안은 한바탕 웃음이 지나갔다. 수영장 벽에 기대 점프만 하고 있던 내게 엄마는 어디선가 초급자 연습용 수영 킥 판을 들고 나타났다. “자, 이거 잡고 발차기하면서 저쪽 끝까지 가봐” “엄마!, 이건 뭐야!, 수영 배울 때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너는 여기서 이거 하면서 놀아. 발차기 연습도 하고. 다리 근육도 생기고 좋잖아.” 옆에서 막내가 거들었다. “언니!, 근육 생기면 탁구 칠 때도 좋을 거야. 엄마 말대로 해봐” 수영 좀 배웠다는 동생이 깐죽대듯이 얘기했다. 내가 수영만 배웠어도 너만큼은 했지. 수영하는 가족들 틈에서 킥 판을 벗 삼아 저쪽 끝에서 이쪽 끝까지 힘차게 발차기를 하며 나갔다. 75세 엄마는 내 옆에서 ‘잘한다, 잘한다.’를 외치며 나를 따라다녔다. 그곳에서 난 영락없는 초보 어린이였고, 그녀는 아이를 달래고 응원하는 젊은 엄마였다.
우리는 관광지에 파는 빨강 하트 머리핀을 하나씩 꽂고 해 질 녘 해상 케이블카에 탑승했다. 우리가 차량으로 건넜던 돌산대교를 내려다보며 반대편으로 이동했고, 이미 해가 진 그곳은 따스한 조명이 반짝이며, 걸어가는 곳마다 사진에 나올만한 풍경을 연출했다. 낮 동안의 무더움은 물러가고 기분 좋게 시원한 바람이 살짝씩 스쳤다. 돌아오는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돌산대교는 조명에 더 웅장하게 보였고, 여수 밤바다는 그런 돌산대교를 지그시 바라보는 듯 평온해 보였다.
여수 여행 마지막 날, 가는 곳마다 딸기모찌 간판이라고 말하는 아빠에게 제주에 오메기떡처럼 여수는 딸기모찌인거 같다고 설명하며 우산을 쓰고 딸기모찌를 사기 위해 줄을 섰다. 여수 첫날부터 시작된 딸기모찌 사랑이 마지막 날에는 딸기모찌, 쑥모찌, 쑥초코파이 가방을 양손에 들 만큼 커져 버렸다. 한껏 신난 딸들을 바라보는 부모님은 웃고 계셨다. 오동도에 걸어갈 때도, 케이블카에 탈 때도, 돌산대교를 건널 때도, 카페에서 여수 바다를 바라볼 때도, 발차기하며 투정 부린 수영장에서도. 이렇게 부모님의 웃는 모습을 자주 본 일이 근래에 얼마나 있었을까. 여수 여행이 즐거운 건 잊고 지낸 어린 시절의 그 기분을 부모님과 함께 느낄 수 있어서였을까. 40년의 세월을 거스른 듯 부모님의 얼굴이 윤이 나는 것도, 아프던 허리가 꾀병처럼 나은 것도 어쩌면 여행이 준 선물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