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6개월이 지났다. 사람들과 직접 공을 주고받은 건 몇 번 되지 않았다. 탁구 레슨이 끝나면 기계 연습을 하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일부러 사람이 없는 시간에 가기도 했지만 서툰 내 실력으로 같이 쳐달라고 다른 회원에게 말 걸 용기도 없었다. 직장에서는 안건을 설명하고 위원들의 질문에 답하며 그들의 동의를 끌어내는 팀장이지만 탁구장에서는 진열장의 작은 피큐어처럼 움직이지도 못하고 할 말도 못 하는 벙어리였다.
레슨 6개월이면 초보 수준의 기초 동작은 몸에 익을 줄 알았지만 내 몸은 딱딱한 갑옷을 입은 랍스터 집게발 같았다. 몸과 머리는 서로가 처음 만난 듯 어색했고 두 손, 두 팔, 두 다리가 각자의 임무를 잊은 채 통으로 움직였다. 공을 정확히 치기 위해선 일정 각도로 팔을 앞으로 보내야 한다. 내 팔은 그 모양을 흉내 내지 못했다. 내 다리도 다르지 않았다. 공을 치기 위해선 다리로 먼저 자세를 잡은 다음 팔이 나간다. 탁구는 팔만 휘두른다고 되는 운동이 아니었다. 여러 번 배운 같은 동작이 나는 늘 처음 같았다.
난 탁구를 사랑한다. 혼자만의 사랑이다. 작고 가벼운 탁구공이 귀엽다. 공을 칠 때 흘리는 땀이 좋다. 공을 상대에게 넘기고 내게로 돌아오는 공을 받고 싶다. “요즘 탁구는 좀 어때? 탁구장에 가려고 준비하는 나를 향해 남편이 물었다. “응! 아직 그대로야.” 남편은 내 대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골프를 해보는 건 어때? 탁구보다 움직임이 적어서 어쩌면 그게 당신한테 맞을 수도 있어. 자신한테 맞는 운동을 찾는 것도 중요해”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빠르고 강하게 날아오는 공을 탁구대 오른쪽, 왼쪽 사뿐히 옮겨 다니며 민첩하게 받아넘기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여유 있게 공을 치고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탁구 실력이 된다면 또다시 6개월을 보낸다 해도 아깝지 않을 거 같았다.
내 탁구 짝사랑을 들은 직원이 직장 탁구동호회가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직원이 총무를 맡고 있었고 잘 아는 선배도 그 동호회에 있었다. 왜 진작 몰랐을까. 동호회에서는 정해진 요일에 코치가 와서 회원들에게 돌아가며 레슨도 해준다고 했다. 비용도 직장에서 보조해줘서 부담이 없었다. 드디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탁구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내 간절함이 통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총무에게 연락했다. 신규회원을 받아도 되는지 회장과 연락해 보겠다는 대답이 왔다. 하루라도 빨리 모임에 가보고 싶었다. 난 지쳤고 사람이 그리웠다.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신규회원은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자기소개서를 써본 적이 없었다. 시험으로 직장에 들어왔고 직장에서도 글 쓸 일은 없었다. 글을 써본 적 없는 사람에게는 글을 쓴다는 자체가 막막하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총무에게 알겠다는 대답은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퇴근 후 책상에 앉았다. 내가 누군 지부터 써 내려갔다. 왠지 반성문 같았다. 지우고 다시 썼다. 이번엔 일기 같았다. 다시 지웠다. 너무 나를 낮춘 듯했다. 이것도 아니었다. 솔직 담백하게 함께 하고 싶다는 내용을 담고 싶었다. 탁구를 배우고 있다고 적었다. 외롭다는 말은 적지 않았다. ‘저는 꼭 이 동호회에서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습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다음날 출근 후 직원에게 글을 보여줬다. “자기소개서요?, 동호회에 그런 것도 내야 데요?” 직원은 놀라며 자기소개서를 읽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거 같다는 직원의 말에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총무에게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당장 내일부터 동호회 시작이었다. 말 없는 탁구 기계와 친하게 지낸 건 여기까지다. 난 이제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 집에서 좀 떨어진 연습장까지 차로 이동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았다. 소풍 전날처럼 사람들이 무슨 옷을 입는지 궁금했다. 그동안 운동복 차림이었지만 당장 오늘 밤이라도 탁구복을 주문하고 싶었다. 봄은 이미 지나갔지만 내게는 비로소 봄날의 시작이었다.
탁구복 생각에 퇴근 시간이 기다려질 무렵 총무에게 전화가 왔다. 자기소개서는 잘 봤는데 회장이 동호회 사람들과 협의를 해서 심사 후 결정해야 하니 기다리라고 한다는 거였다. “자기소개서만 제출하는 거 아니었어? 내가 물었다. “미안한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회장이 심사를 거쳐야겠다고 하네. 일단 이번 주는 안 될 거 같아, 좀 기다려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아쉬워 자기소개서를 쓰긴 했지만, 동호회 문턱이 이렇게 높을 줄 예상 못 했다. 나의 격양된 목소리에 총무가 말했다. 신입회원이 들어오면 기존 회원들이 받던 레슨 시간을 신입회원과 나눠야 하는데 그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는 거다. 직장에서 지원되는 강사비에 그들만의 리그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난 그저 그들의 레슨 시간을 뺏어갈 신입회원 심사 대상자였다.
난 많이 지쳐있었다. 기계처럼 6개월째 로봇처럼 같은 동작만 반복했고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 걸 재간도 못 됐다.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더라면 어땠을까. 동호회에 있다는 선배 언니가 생각났다. 그녀에게 전화했고 그녀는 놀라며 그런 규칙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동호회 임원들의 장난인지 그날 밤 내내 눈물이 흘렀다. 슬펐는지, 서러웠는지, 분했는지 이 모든 것들이 다 섞인 거 같았다. ‘동호회에 들어가는 게 최선일까?’ ‘그 사람들과 같이 웃으며 칠 수 있을까?’
그날 밤 총무에게 동호회에 가입하기로 한 일은 없던 거로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고 공허했다.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첫사랑처럼 난 여전히 탁구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탁구장으로 향했고 레슨을 받고 기계로 연습했다. 이제 혼자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수줍은 짝사랑을 멈추기 위해 더는 누가 먼저 나를 불러주길 기다릴 시간이 없다. 난 어른이고 어리광은 여기서 멈춘다.
일찍 오는 회원에게 소심하게 말을 걸었다. “저 아직 초보인데요, 혹시 10분만 저랑 쳐주실 수 있으세요?” 6개월 반복된 일상에 잔잔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