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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라 May 08. 2022

탁구장 소심쟁이 드디어 밤에 나오다

탁구 이야기

그날은 평소와 다른 시간에 탁구 레슨이 시작됐다. 온종일 일정이 빠듯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많아지는 저녁 7시가 넘어 탁구장으로 향했다. 처음 탁구장을 방문한 그날처럼 탁구장 불빛은 환했고 탁구대마다 사람들은 활력이 넘쳤다.     


탁구장에는 회원들이 치는 탁구대 몇 개가 놓여있고 다른 한 편에 레슨용 탁구대 2개가 있다. 레슨실과 일반 탁구대 사이에는 공이 튀어 나가지 않게 망사 철문이 놓여있다. 레슨용 탁구대에서는 관장과 코치가 각각 레슨 한다. 나는 관장에게 레슨을 받았다.      


관장의 레슨이 시작될 때쯤 옆 테이블에 코치도 레슨을 시작했다. 조용한 시간에 혼자 레슨 받고 가는 게 익숙한 터라 옆에 다른 레슨이 있다는게 어색했다. 최대한 옆은 신경 쓰지 않고 관장의 말에 집중하려 했다. 레슨이 끝나고 바닥에 떨어진 공을 정리할 때 어디선가 익숙한 억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자기도 여기 다니고 있어?” 고개 돌려 옆을 보니 반가운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녀는 아파트 입주 때부터 7~8년을 같이 지내다 이사 간 위층 이웃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보는 것이 전부였고 따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가끔 현관 앞에 채소를 놓아주기도 하는 무심한 듯 따뜻한 언니였다. 마지막으로 언니와 통화한 것은 이미 그녀가 이사 간 다음이었다. 어느 날 남편이 11층 새로 이사 오는 거 같다고 하는 말에 깜짝 놀라 “뭐!, 그럼 11층 이사 간 거야?” 하고 놀라 물었다. 서로 왕래하며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지만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에 전화했다. 그녀의 사업장 전화번호를 저장해둔 것이 다행이었다. 그녀는 타지에서 제주에 내려와 사업을 시작했고 이제는 자리 잡아 건물을 짓고 이사하게 됐다는 말을 했다. 건물주가 되어 이사 갔다는 말에 성공을 축하하며 인사를 나눈 게 마지막이었다. 그날 난 11층 언니와 나란히 레슨을 받았던 거였다.      


“탁구장에서 처음 보네, 얼마나 됐어?” 그녀가 물었다. ‘내가 얼마나 됐을까, 6개월은 넘었고, 8개월인가? 아니 9개월?’ 나는 머리로 빠르게 달력을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먼저 말했다. “아까 레슨 받는 거 보니까 한 달은 된 거 같은데? 이제야 등록한 거야?” 


어쩜, 6개월이 지나도 매번 처음 배우는 듯한 느낌은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도 내가 그렇게 보였다는 게 부끄럽고 알아차림이 신기하기도 했다. 웃음이 나왔다. 한 달 쯤이라 추측한 그녀의 다음 반응이 궁금했다. 그녀의 발랄한 물음에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내 대답과 동시에 옆에 있던 코치가 말했다. “아닌데요, 이 회원님 오래되셨어요.” 코치와 나는 서로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는지 언니도 따라 웃었다.      


11층 언니는 탁구장에 다닌 지 3개월쯤 된다고 했다. 다른 동네로 이사는 갔지만, 이사 간 집 근처에 탁구장이 없어 익숙한 우리 동네 탁구장에 등록한 거였다.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는 언니는 처음 본 사람들과 거리낌이 없었다. 그 사이 언니는 탁구장 동호회도 들고 초보들만 출전할 수 있는 대회도 출전했다고 했다. 어렸을 때 잠깐 운동을 했었다는 그녀의 실력은 탁구장에 다닌 기간과 상관없었다. 그녀의 3개월은 나의 8개월 그 이상이었다.


나보다 실력은 훨씬 나아 보였지만 탁구장에선 둘 다 초보였다. 우리는 서로 어느 요일에 탁구장에 올 수 있는지 연락했다. 될 수 있으면 서로 시간을 맞췄고 나의 저녁 시간은 그녀와 연습이 우선이었다. 그녀와 만나는 날이면 기계 연습도 하고 다른 회원들에게 10분만 쳐달라고 부탁하며 기다렸다. 끝이 있는 기다림은 지루하지 않았다. 막연히 혼자 연습하다 집으로 돌아갈 때와 다르게 마음이 편했다. 


우리는 레슨에서 배운 동작 하나를 정해 서로 공을 넘기고 받으며 감각을 익혔다. 공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몇 번 랠리를 할 수 있는지 목표를 정했다. 30번을 목표로 해서 성공하면 50번, 100번까지도 했다. 공이 네트에 걸리거나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기 위해선 일정한 속도와 힘을 유지해야 했다. 공이 너무 빨라도, 힘이 너무 강해도 안 됐다. 목표 횟수를 채우면 다른 동작으로 연습했다. 서로가 약한 부분은 계속 반복했다. 나는 부지런히 언니를 따라 하려 애썼다.   


사람들이 몰리는 저녁 시간 탁구를 하다 보니 그 시간대에 오는 회원들 얼굴이 익숙해졌다. 익숙한 얼굴에 반복되는 짧은 인사만으로도 회원들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차츰, 언니가 못 오는 날도 기계 연습 시간보다 사람과 치는 시간이 늘어났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같이 쳐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나는 정식으로 탁구 동호회에 가입했다. 동호회는 자기소개서나 심사 따윈 필요 없었다. 함께 하고픈 마음이면 충분했다. 탁구장의 밤은 밝은 조명으로 대낮처럼 환했다. 드디어 탁구장 소심쟁이가 밤에 나왔다. 밖에 나오니 기계가 아닌 사람이 보였다. 탁구장은 나에게 사람과 탁구를 하는 곳이 되었다. 이제 남은 건 탁구 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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