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게임에서 지면 ‘예탈’ 확정이다. 남은 건 예선 2번째 경기. 예선전은 3세트인데 첫 번째 경기는 채 10분이 안 걸려 엉성하게 졌다. 지난겨울 동안 주 7일 탁구장에 나가 연습한 게 무색하게 팔도 다리도, 머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름 초보 경력자인데 부끄러운 내 경기를 아무도 안 봤으면 했지만, 동호회 사람들은 응원하고 있었다.
‘제발!’ 다리야 좀 움직여라. 예선 2번째, 마지막 세트 10대 10 듀스다. ‘아! 예선 통과하고 싶다!’ 내가 한 점을 먼저 얻었다. 11대 10. 남은 건 단 1점. 서브권은 내게 있다. 뒤에서 고수님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백서브’. 심호흡을 하고 왼손으로 공을 띄웠다. 천천히 내려오는 공의 아랫부분을 치며 공을 대각선으로 보냈다. 빠른 서브는 아니지만 약간 하회전이 들어간 백서브다. 상대는 살짝 뜨게 온 공을 앞으로 밀었고 공은 준비됐다는 듯 네트에 걸렸다. 내가 이겼다. 예선 통과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나는 오름부다. 오름부(9부)는 제주도 생활체육 탁구 제일 하위 그룹이다. 8부인 금강부가 되기 위해서는 4포인트가 있어야 한다. 승급대회에서 8강에 올라가면 포인트 1점을 받는다. 금강부가 되는 가장 이상적인 코스는 결승에 올라가는 거다. 우승자와 준우승자 모두가 8부 직행권을 받기 때문이다. 4년이 넘는 동안 나는 16강에 간 게 전부다. 결승 진출은 바라지도 않는다. 8강에 가서 1점이라도 갖고 싶다. 오늘이 바로 올해 첫 승급대회다.
본선 토너먼트는 64강부터 시작이다. 왜 이리 초보가 많은지 대회 때마다 초보는 줄지 않는다. 진정 초보인지 초보라는 이름에 숨어 있던 승급 대기자들인지 게임을 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의 본선 첫 상대는 이긴 적도 있고 진 적도 있는 ‘서귀포에이스 동호회’ 선수다. 그 말은, 오늘 경기는 알 수 없단 말이다. 마인드컨트롤이 필요하다. 공이 제법 잘 들어간다. 탁구장에서 연습할 때 리듬이 나오는 듯하다.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랠리를 해보자 다짐한다. 한 점씩 점수판은 올라가고 있는데 내 입술은 바싹 말라왔다. 여기서 흐트러지면 안 된다. 작은 눈을 최대한 크게 떴다. 3대 0으로 한 세트도 내어주지 않고 이겼다.
64강을 통과했으니 32강이다. 상대는 누굴까? 실시간으로 대진표가 올라온다. 앗! 2023년 ‘로그인렌트카배 탁구대회’ 오름부 우승자다. 그녀가 여전히 ‘오름부’라는 게 원망스럽다. 우승도 아니고 준우승도 아니고 8강에만 들어보자고 외쳤건만 32강에서 그녀를 만나다니. 어쩌란 말인가. 내가 조 1위로만 올라갔어도 대진표가 이리되진 않았을 텐데, 이미 끝나버린 예선전에 미련이 남는다. 32강은 점심시간 이후 진행된다.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순두부에 숟가락을 넣었다. 한 바퀴 휘저었다. 숟가락 가득 순두부를 떴다 다시 담았다. 어떻게 경기를 풀어갈까? 그녀는 공이 조금만 떠도 시원하게 잘 때린다. 치기 좋게 공을 넘기면 안 될 텐데. 혹시 그렇게 공을 주더라도 딱 한 번만 막으면 되는데. 아! 수비도 자신이 없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머리도 마음도 복잡해진다.
32강이 시작됐다. 첫 세트를 이겼다. 희망이 보였다. 서로 한 세트씩 주고받으며 세트 2대 2가 됐다. 결전의 5세트. 점수는 4대 4. 갑자기 4점을 내리 져 점수는 8대 4. 경기는 11점이면 끝난다. 뒤에서 응원하던 동호회 사람들이 긴급히 타임을 불렀다. 나를 부르는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에게 동호회 동생이 말했다. “누나! 알고 있어요? 누나가 연속 4점을 내리 져서 지금 8대 4가 된 거요” “응, 그런 거 같아” “생각해 보세요. 세트 2대 2에요. 둘이 비슷하다고요. 절대 누나가 밀리지 않아. 그러니까 반대로 누나가 내리 4점을 얻어서 동점을 만들 수도 있어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한 점씩 따라잡으면 돼요.” 천천히 그의 말을 곱씹으며 탁구대로 돌아왔다. 탁구대 위에 놓았던 라켓을 꽉 쥐었다. 상대를 바라보았다. ‘밀리지 않아! 그래, 밀리지 않아!’
내게 서브권이 있다. 어깨를 풀며 제자리에서 통통 뛰었다. 배에 힘을 주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슨 서브를 넣어야 할까?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뭘까?’ 마음을 가다듬고 서브를 넣었다. 상대가 리시브했고 나는 너무 소중한 공을 조심스레 넘겼기고, 또 넘겼다. 섣부른 공격으로 점수를 내줘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공을 느슨하게 넘길 수도 없다. 적당히 상대가 함부로 때리지 못할 정도로 넘겨야 한다. 한 점을 가져왔다. 또 한 점을 가져왔다. 그리도 또 한 점. 드디어 점수판에 8대 8이 보였다. 동점이었다. 환호의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잠시, 마음이 들떴던 걸까, 순식간에 상대에게 내리 2점을 주며 점수는 10대 8이 되었다. 분위기는 급변했다. 모두가 침묵에 잠긴듯했다. 이제 단 1점. 실수하면 오늘의 경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마른침을 삼켰다. 서브를 위해 자세를 낮췄다. 왼손바닥 한가운데 올려놓은 공이 흔들렸다. 마음도 흔들렸다. 안전하게 서브하고 랠리로 버티자. 완전한 찬스볼이 아니면 내 공격 성공률이 50%도 안 된다는 걸 안다. 버티고 또 버텼다. 한점, 또 한 점. 10대 10 듀스다. “우와!” 고요를 깬 건 동호회 사람들의 함성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동호회 동생의 외침이 진짜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했다. 상대가 보낸 공을 커트로 받았다. 커트렐리가 시작됐다. 긴장만 하지 않는다면 연습 때처럼 공을 보낼 수 있다. 최대한 정성스레 계속 공을 넘겼다. 얼마나 버텼을까, 상대가 실수했다. 나만큼이나 긴장했을 상대다. 단 1점. 마지막일지 모르는 랠리가 다시 시작됐다. 요리조리 빼는 공을 쫓아가서 사뿐히 넘겼다.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을까. 상대가 또 실수했다. 10대 12. 경기는 끝났다.
“이게 32강이야? 결승전인 줄 알았어.” 내 어깨를 두드리는 동호회 언니의 목소리에는 흐뭇함이 묻어있었다. 그제야 미소가 번졌다. ‘이겼다.’
16강도 3 대 0으로 이겼다. 발이 가벼웠다. 그토록 바라던 8강에 내가 도착했다. 드디어 내게도 1점이 생겼다. 다음 상대는 누굴까? 대진표가 나왔다. 아! 최근 치러진 대회 우승자다. 우승을 여러 번 했지만, 승급 대회가 아니어서 8부로 올라가지 못한 비운의 그녀가 내 상대였다. 마음이 작아졌다. 32강 때와는 또 달랐다. 요즘 승승장구하는 그녀다. 얼마 전에도 내가 3 대 1로 졌다. 8강은 시작됐고 너무나도 빠르게 한 세트를 내줬다. 두 번째 세트는 내가 앞섰지만 조급해진 마음에 실수를 연발하며 역전패했다. 더 작아진 마음은 3세트를 버티지 못했다. 3 대 0으로 졌다. 작아진 마음이 보폭까지 줄게 했는지, 발놀림도 예선전 때로 돌아간 듯했다. 허무하기 그지없는 경기였다.
목표를 8강으로 잡아서 그런 걸까. 나의 32강이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8강이 심심해진 걸까? 오늘 획득한 1점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던 걸까. 내가 두 번째 세트를 이겼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아쉬운 8강을 복기해 본다. 32강에서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사고의 한계가 내 실력도 한계 지어버린 거 같다. 밀리지 않는 실력은 밀리지 않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늘 대회가 끝나면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대회의 아쉬움이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그래도 나의 1포인트는 더없이 기쁘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