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가까운 곳에 탁구장이 생겼다. 요즘같이 놀 것 많은 세상에 탁구장이라니. 특히 탁구 인구가 많지 않은 제주에서 탁구장을 연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 같은 자칭 탁구인에게는 더없이 기쁘고 신나는 일이기도 하다. 놀이터가 하나 더 생겼으니 말이다.
주말, 새 탁구장 구경에 나섰다. 탁구장은 지하에 있었는데, 1층 입구부터 지하까지 계단이 시원하게 쭉 뻗어 있었다. 한 계단씩 아래로 내려갔다. 실내화가 가지런하게 놓인 신발장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돌리니 줄 맞춰 놓여있는 반들반들한 새 탁구대, 검은색 노출 천장에 장식처럼 박혀있는 시스템에어컨, 입구에 늘어선 초록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캡슐 커피머신 옆으로는 종류별로 티백이 놓여있고 벽걸이 TV에서는 중국 마롱 선수의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지하세계가 천상처럼 느껴졌다. 천장에 줄지어 있는 환한 전등이 그곳에 들어서는 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어서 와! 새 탁구장은 처음이지?’
운동 가방을 둘러맨 채 머뭇거리는 우리에게 관장은 이쪽에서 치라며 비어있는 탁구대를 가리켰다. 우리의 뒤를 이어 사람들이 계속 들어왔다. 역시나 새로 생긴 탁구장을 구경하기 위해 탁구가방을 둘러매고 온 사람들이었다. 햇살 환한 주말, 나들이도 마다하고 탁구를 치기 위해 사람들이 지하로 몰렸다. 그것도 환한 표정으로 말이다. 누가 가라고 한 것도 아니고 일부러 찾아온 탁구장이니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우리는 처음 보는 회원들과 연습했다. 누구라도 탁구라켓만 들고 있다면 쉽게 대화가 시작될 수 있는 곳이 탁구장이다. 고수든 하수든 한 게임씩 하면서 한 수 배울 수 있는 여유가 그곳에서 생긴다. 함께 뛰며 땀 흘리는 동안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무언가가 만들어진다. 이런 당김의 매력을 탁구는 가지고 있다.
처음 탁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탁구에 대해 알지 못했다. 탁구대는 아담해 보였고, 작은 공도 귀여웠다. 100m를 20초에 뛸수 있는 내가 시작하기에 딱 맞는 운동이라 생각했다. 탁구를 선택한 이유가 그러하니 나의 탁구 인생이 순탄할 리 없다. 라켓 잡는 법, 자세 잡는 법, 공을 치기 위한 스텝까지,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운동이 탁구 같다. 4~5년이 지난 지금도 초보 단계에서 허덕이고 있으니 알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때는 최악의 선택이, 지금은 최고의 선택으로 바뀌었다. 나는 탁구를 알지 못했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짧은 실력으로 탁구에 재미를 더 한 것도 이유지만, 그동안 내가 얻은 것이 탁구 실력만은 아니다. 작고 빠른 탁구공을 치기 위해 탁구대를 이리저리 뛰는 사이 예전보다 단단해진 하체를 갖게 됐고, 자세를 잡아야 하니 균형감도 따라왔다. 그뿐인가, 에너지와 활력, 그리고 탁구로 이어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며든 웃음까지. 내 인생의 흩어져있던 작은 점들이 탁구라는 가늘고 긴 선으로 연결된 기분이다.
혹시 예전의 나처럼 무언가 운동을 해야겠다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당장은 최악의 선택이 될 수 있는 ‘탁구’를 권해주고 싶다. 라켓 잡는 법을 배우고 스텝과 스윙을 배우는 데는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버틴 100일보다 한 참의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특히 나처럼 마흔이 넘어 탁구에 입문한 경우, 운동이라곤 해본 적 없는 경우는 더욱 그럴 거다. 아직 무릎이 건강하고 뛰어볼 의지가 있다면 나는 스티브 잡스의 어투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아직 오지 않은 남은 인생 침대에 기대 유튜브 쇼츠나 보며 보내겠습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움직이는 공을 치며 젊음과 에너지로 인생을 채우겠습니까?”
연습이 끝났다. 허기졌고 땀으로 다 젖어버린 옷은 축축했다. 하지만, 지상 세계로 나가는 계단을 오를 때마다 가슴이 떨렸다. 바로 전까지 연습했던 스윙, 스텝, 박자를 복기해 본다. 나는 반복해서 연습할 거고, 계속 나아질 거다. 내가 밟고 있는 이 계단이 천국의 계단일지 모른다. 나는 오늘도 탁구를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