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의 에세이] 소설 <숨그네>를 읽고 (1/2)

헤르타 뮐러 지음, 문학동네 출판 / 박경희 옮김

by 채유

<숨그네>의 첫인상은 수수께끼였다.

첫 번째로 '숨그네'가 무엇인지 몰랐고, 두 번째로 처음 약 10장 정도는 <숨그네>의 화자이자 주인공 '레오'의 성별이 명확하지 않았다. 세 번째로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참가하게 될 독서 모임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날 예정이며, 감상이 어떻게 다를지에 대한 궁금함이 연속되었다.


<숨그네>를 읽어가는 과정에서는 낯섦과 낯익음이 반복되었다.

한동안 규칙적으로 방문했던 도서관을 너무 오래간만에 들려서 반가웠지만, 800번대 서가로는 들르지 않은 지 오래라서 책을 찾아가는 길이 어색했다. 낯선 위치의 책장에서 "숨그네, 헤르타 뮐러, 853 뮐"이라고 중얼거리며 발견한 블랙톤 커버의 책은 외형이 마음에 쏙 들었지만, 이내 목차를 열었을 때 연속성이 없는 소제목들과 '숨그네'와 마찬가지로 난해한 단어들의 나열은 당황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처음 5장이 진도 나가기가 정말 쉽지 않았는데, 이유는 주인공인 레오의 성별이 불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할아버지/삼촌에게서 받은 물건, 남자와의 랑데부, 어머니에 대한 언급, 사랑 등을 언급할 때마다 묵독하는 내 머릿속에서 문장의 높낮이가 달라졌다. 조용한 혼란 속에서 결국, '난 엄마 아들이잖아요.'라는 문장을 통해 레오가 남자이며, 랑데부를 네이버 사전에 검색하고 나서야 동성애자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랑데부가 데자뷔랑 헷갈렸다). 새삼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인지를 깨닫는 시간이었다.

또한, 루마니아/독일/러시아의 지리적/역사적 배경으로 쓰인 소설답게 레오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지명이 익숙하지 않아 쉽게 읽히지 않았다. 결국, 앞/뒷장을 팔랑팔랑 넘기며 사람과 얽힌 일화를 곱씹으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지명은 그냥 흐린 눈으로 넘어갔다. 숨그네를 한 번 완독하고 다시 읽을 때는 인물 관계도가 머릿속에 구현된 상태라 좀 더 매끄럽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인상 깊었던 장(章)은 '짐 싸기에 대하여', '다문화 공동체', '손수건과 쥐', '배고픈 천사에 대하여', '뻐꾸기시계의 환지통에 대하여', '초승달마돈나', '내 빵과 볼빵', '수용소의 행복에 대하여', '나는 여전히 피아노'로 손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미리 언급하자면, 위에 나열된 '배고픈 천사', '초승달마돈나', '볼빵'이 이해되지 않거나 띄어쓰기가 틀렸다고 생각된다면 정확히 본 것이다. 제목인 '숨그네', 여기에 적히지 않은 '한방울넘치는행복'과 '심장삽' 등을 포함해서 일부 단어들은 작가가 만들어낸 조어(造語)이다. 이 조어라는 단어도 이 책의 해설 부분을 통해 처음 접했는데, 합성어(合成語)라고 하기에는 작가가 창작해 낸 단어라서 이렇게 지칭이 된 것 같다. 사전을 조금 더 찾아보니 '조작(造作)하다'에서 나오는 한자와 같은 조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루마니아/독일/러시아의 언어와 번역된 언어인 한국어 그리고 한자까지 이해해야 했기 때문에 더 어렵게 느껴졌다. 다행히도 레오가 원어로 꾸며내는 조어나 언어유희에 대한 설명은 페이지마다 알맞게 주석이 달려있어서, 아무것도 몰라도 일단 읽어나갈 수는 있었다. 그런데도 마치 고유명사처럼 책 안에서 자연스럽게 언급되는 이 조어들은, 단순히 음절 혹은 단어의 합성을 넘어서 내포한 뜻을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볼빵과 같은 단어는 어떤 느낌인지 감이 왔지만, 책을 다 읽고도 명확히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첫 번째 장인 '짐 싸기에 대하여'에서는 랑데부를 가지던 레오가 안고 있던 내면의 죄책감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극일지 모르는 수용소행 통보를 듣고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 인상 깊었다.

동성애자인 그에게 랑데부는 언젠가 들킬 거라는 아슬아슬함과 들통났을 때 가족들(특히 어머니)한테 경멸당하고 혐오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으나 끝내 반복의 고리를 끊을 수 없었던 중독이었다. 마음 어딘가가 결여된 청소년들이 습관성 절도를 저지르는 경우가 이런 느낌인 걸까? 성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랑데부는 범법을 넘어서 그에게 무언가 치명적으로 끌리는 행위였을 것임은 분명하다. 어쨌든 외국 나이여도 17살이면 성 정체성을 깨닫고 사춘기 시절을 혹독하게 겪기엔 충분한 나이니까.

내가 레오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부분은 '수용소'를 가게 됨으로써 느끼는 그의 해방감이었다. 미성년자들이 으레 어른이 되고 싶어 하지만, 나는 어른이 되는 것보다도 빨리 독립하기를 꿈꿨다. 그래서 마침내 19살 고향을 벗어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에서 살기 시작했다. 많은 지방 출신들이 그렇듯 계기는 타지에 있는 대학교 입학이었고, 부모님이 바라는 인서울 대학교가 아니었음에도 나는 전액 장학금을 핑계로 꿋꿋이 마지막 미성년자로서의 해를 시작했다. 부모님은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나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삶의 방향을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성이 차고, 고난을 겪어도 후회가 없으므로 지금 돌이켜 봤을 때도 고집스레 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어린 나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새로운 유형의 삶을 시작한다는 면에서, 강제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레오가 내심 안도하고 설레 했던 수용소 징집은 내가 19살 느꼈던 해방감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독립한 19살은 만 17살로, 외국 나이를 고려하면 레오의 17살과 같은 것 같다. 공교롭다.


'다문화 공동체'라는 장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레오가 이 책을 통해 곱씹어보는 등장인물들이 한 번씩 언급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장이었던 '짐싸기에 대하여' 이후 바로 두 번째 장부터는 수용소에 도착하고 나서의 에피소드였다. '다문화 공동체'에서 사람들을 주르륵 언급하기 전까지 나 또한 레오와 함께 수용소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비로소 '다문화 공동체' 장을 읽고 나서야 초등학교/중학교 시절 매해 3월 겪어야 했던 새로운 학년/반 친구들에 적응한 기분이었다.


'손수건과 쥐'에서는 아들을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보낸 늙은 여인의 뜨끈한 감자 수프와 레오에게 선물한 흰색 아마포 손수건의 미각/촉각/시각적인 느낌이 강한 에피소드였다.

몹시 추운 날, 레오는 방문판매를 나갔고 닭 두 마리를 키우는 러시아 여인의 집에서 따끈한 감자 수프를 먹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겨울은 경험해 본 적 없지만, 대한민국의 영하 13도는 경험해 본 바 있다. 어느 몸서리쳐지게 추운 겨울날, 집에 들어와서 미리 끓여놓았던 달걀감잣국의 냄비 뚜껑을 열었을 때 얼굴을 감싸던 온화한 김, 감자의 포실한 식감, 식도를 타고 위에 안착하는 뜨끈한 국물이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이 따뜻한 러시아 여인이 손에 쥐여준 흰색 아마포 손수건은 레오가 운명으로 새기고 있던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할머니의 작별 인사가 정결한 모습으로 치환된 물건이었다. 레오는 또래라는 아들 대신 여인의 앞에 있는 것을 송구스러워했다. 콧물은 결국 이 손수건이 아닌 석탄 보자기에 풀었고,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눈물도 닦았다. 그리고 장미꽃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이 고급스러운 하얀 손수건을 통해 수용소에 오기 전 누리던 일상을 들춰보았고,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가 느꼈던 이 오묘한 벅참과 애끓는 향수는 내가 초등학생 시절 겪었던 2박 3일의 수련회에서 느낀 것과는 차원이 다르겠지.

사실 이 에피소드 끝에 새끼 쥐 여섯 마리를 퐁당퐁당 변소에 떨어뜨려 익사시킨 것은 앞의 내용과 무슨 개연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레오는 베개 밑에서 발견한 새끼 쥐들을 보고 애정과 연민을 느꼈고 어떠한 울컥거림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성의 회복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숨그네에서 배고픈 천사는 언급되지 않더라도 내내 레오를 비롯한 수용소 사람들에게 치명적이고 엄중한 모습으로 함께하고 있다.

'배고픈 천사에 대하여' 장이 나에게 인상 깊은 점은 배고픈 천사의 정체를 언급하는 것과 별개로 '숨그네'라는 단어의 힌트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직 머릿속에는 숨그네가 뭐지? 하는 물음표를 그리고 있었다. 숨그네는 숨과 그네를 합친 조어로, 배고픔과 노동의 고역으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헐떡이는 상태이다.

책에 쓰인 '심장삽은 온전히 자기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금세 눈치 챈다. 그럴 때는 가느다란 공포가 목을 조인다. 관자놀이의 맥박이 미친 듯이 뛴다. 나는 무너지기 직전이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목젖이 붓는다. 배고픈 천사는 입 안에, 내 입천장에 오롯이 매달린다. 그건 배고픈 천사의 저울이다. 배고픈 천사가 내 눈을 제 안경처럼 덧쓰고, 심장삽은 현기증을 일으키고, 석탄은 흐릿하게 보인다. 배고픈 천사가 내 뺨을 그의 턱 위에 끼워 맞춘다. 그리고 내 숨결을 그네 뛰게 한다. 숨그네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착란 상태이다.' 문장들이 수용소 생활의 고초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한다.

이 느낌을 내가 왜 알고 있을까? 예전에 호기롭게 도전했다가 이틀 만에 포기하고, 내가 절대 육체파(반대말은 두뇌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던 국토대장정의 첫날을 떠올려보았다. 당시 45kg이었던 나는, 개인 짐과 텐트를 포함해서 내 몸무게의 반을 등에 지고 있었다. 그 상태로 뜨거운 여름, 내리쬐는 태양 밑에서 검은색 아스팔트 위를 대열을 맞추기 위해 평소와 다른 보폭으로 약 15km를 걸었다. 더는 못 걸어, 현기증이 나서 아스팔트 끝 지평선의 아지랑이가 나를 덮쳐오며 발이 질질 끌릴 때면 공교롭게도 쉬는 시간이 돌아왔다. 나름 깔끔 떠는 성격이었지만 그날만큼 전심전력으로 돌아볼 것 없이 철푸덕 바닥에 앉아 포도당 알약을 목으로 넘기기 바빴던 적은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절대 걸을 수 없는 상태라고 판단해서 포기했고, 집에 돌아와서 일주일 동안 앓았다. 허리가 너무 아팠다. 그때의 일주일을 나는 '100세 할머니 체험'이라고 한다.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늘그막에 이렇게 허리가 아프고 꼼짝도 못 하게 되는 걸까? 이후로 나는 절대 두뇌파이며, 머리 굴리는 것이 천직이려니 했다. 건강 관리 측면에서 이론만 빠삭하게 된 것도 이때의 경험이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뻐꾸기시계의 환지통에 대하여'는 공대생 출신인 나에게 아주 반가운 장이었다.

어렸을 적 아날로그시계를 분해해 본 경험은 정말 흥미로웠는데, 직경과 이빨 개수가 다른 두세 개의 기어가 맞물리고 한 개의 모터가 초침/분침/시침을 조절하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열두 살부터 장래 희망란에 엔지니어라고 적게 된 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그때 한참 친구 집의 뻐꾸기시계와 외삼촌 집의 괘종시계를 보고 입맛을 다셨던 것이 기억이 났다.

수용소에 달려있던 뻐꾸기시계는 태엽을 감아서 쓰며, 솔방울 시계추 두 개와 진자 막대기, 시간을 알리는 뻐꾸기로 이뤄진 제품이다. 그리고 우습지만 고장이 나서 뻐꾸기는 제대로 시간을 맞춰 울지 않았다. 결국 누군가 이 뻐꾸기를 뜯어냈고, 뻐꾸기가 활동할 시간이 되면 대신 지렁이처럼 생긴 고무 조각이 비틀린 문을 열고 나온다. 환지통은 팔다리가 잘린 후에도 없어진 신체 부위에 느끼는 통증으로, 이 고무 조각이 잃어버린 뻐꾸기 대신 때마다 진동하는 것을 비유했다.

레오는 뻐꾸기시계의 솔방울 추를 보고 고향의 전나무 숲을 떠올린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수용소 사람들은 시계가 아닌 아침과 저녁에 울려 퍼지는 국가, 공장의 사이렌 소리, 코크스 가마의 종소리 등을 통해 하루의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고 다음 일과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배고픈 천사에게 지배되는 수용소는 시계를 충만히 감상하기에는 힘들고, 지치고, 째깍거리는 소리조차 고통인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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