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의 에세이] 소설 <숨그네>를 읽고 (2/2)

헤르타 뮐러 지음, 문학동네 출판 / 박경희 옮김

by 채유

☞ [엔지니어의 에세이] 소설 <숨그네>를 읽고 (1/2)에서 이어집니다.


수용소와 배고픔은 이들에게 이음동의어이다.

그러므로 '초승달마돈나'에서는 이러한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인 노력이 서술된다. 어린 시절과 음식에 관해 얘기하고, 빵을 아껴 먹고, 오랜 시간 수프를 신중하게 떠먹는다.

남자들보다 섬세한 여자들의 음식 이야기는 요리 재료부터 시작해서 조리법과 팁을 공유한다. 시골 여자들은 풍족한 재료를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도시 여자들에게는 재료 절약이 관건이라는 디테일이 이 일화를 특히 살린 것 같다. 대학생 시절 나의 요리는 도시 여자들과 같았고, 입사 후에는 삼시 세끼 회사에서 밥을 먹느라 요리에 관심을 끊었지만, 재택근무를 시작한 작년부터는 틈틈이 식자재를 사는데, 양 조절에 자꾸 실패해서 시골 여자들의 요리처럼 풍성해져 버린 음식을 하곤 하기 때문이다. 양파/당근/양배추/감자/양상추 그리고 가끔 사다 놓는 제철 과일이 요즘 내가 먹고사는 문제의 주인공이 된다. 우리 회사에는 중년층의 남자가 많은데, 상대적으로 남자들이 음식에 대해 관찰력이 떨어지는 것도 일부 공감해서 웃음이 나왔다. 물론 먹는 것에 진심인 사람들은 성별이 문제 되지 않는다. 특정 성별이 주방에 들어가는 것이 저어되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초승달마돈나는 레오가 어린 시절 여름 별장을 갔던 일화에 나오는데, <기찻길옆 아이들>이라는 책의 표지가 그려지는 묘사였다. 그네를 타는 초승달마돈나가 있는 카페에서 먹었던 디저트의 묘사를 보면 레오는 어렸을 때도 먹는 것에 진심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혹은 '여성스러운 게이'의 편견을 조금 반영한 것 같기도...

안타깝게도 앞의 재잘거리는 밝은 분위기와 다르게 결국 '초승달마돈나'는 음울한 침묵으로 마무리한다. 왜냐면 그들은 재료도 없고, 자유도 없는 수용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제철 농작물은커녕, 음식물 쓰레기에 비할 바 없는 소량의 찌꺼기에 물을 붓고 끓인 수프를 각자의 방법대로 떠먹을 뿐이다. 최대한 오래, 천천히 수저질 하며. 마치 그렇게 먹으면 포만감이 느껴지는 것처럼.


수용소에서 배급되는 빵과 수프는 고된 노동에 비해 터무니없는 양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빵을 쪼개 먹고, 수프에 침을 섞어 먹고, 심지어 음식물 쓰레기 더미를 찾아가서 감자 껍질을 찾기도 한다.

'내 빵과 볼빵'은 치명적으로 충족되지 않는 식욕을 어떻게든 채워보기 위한 발악이 그려진 장이다. '남이 떡이 더 커 보인다'라는 한국 속담은 수용소 안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정량 배급된 빵을 서로 바꿔먹는 것이다. 마치 꽉 막히는 2차선 도로에서 내 차선보다 옆 차선이 더 빨리 빠지는 것 같아 차선 변경을 하면 또 옆 차선이 빨리 빠지는 것 같다. 결국 돌아오면 오히려 원래 차선에 있었던 자리보다 몇 대 뒤에 서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조급할수록 이 착각에 빠지기 쉬운 것 같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수용소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배급되는 빵의 정량의 기준은 중량(g)이다. 저울이 그 수치를 알려준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아침에 배급받은 빵을 저녁때까지 쪼개 먹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빵은 건조되며 밀도가 높아진다. 굶주린 저녁 시간, 쪼그라들며 형태가 변형된 빵을 다른 사람들의 것과 곁눈질하며 비교하는 것은 사람 심리상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내가 최고로 꼽는 명언이다. 안타깝지만 빵 바꾸기의 결과가 성공적인 것인지는 의문이다. 더 늦은 시간에 저녁 식사를 시작하지만, 원래의 내 빵을 먹게 되는 것이다.

볼빵은 볼(신체 부위)과 빵으로 만든 조어이다. 책에 따르면, '흰 토끼와 바꾼 빵을 볼빵이라고 부른다.'라고 쓰여 있다. 흰 토끼는 죽음을 비유한다. 그러니까 곧 죽을 사람의 빵을 볼빵이라고 하는 것이다. 너무 야위어서 볼이 우묵하게 패인 사람의 광대를 상상했다. 볼빵은 그런 느낌일 것 같다. 거칠고, 척박하며 그늘진.

다만 놀라운 것은, 정신박약자인 카티의 빵을 다른 사람들이 지켜주었다는 부분이다. 짧게 언급하자면, 카티는 명령을 이해할 수 없어서 결국 일을 맡기지 못하고, 태고의 순수함을 간직한 채 수용소에서 머물렀던 천치(天癡)이다. '살아남았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봐서,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부분에서 카티와의 빵 바꾸기를 금지한 것은 사람들이 마지막 인간성을 놓지 않기 위한 발악처럼 느껴졌다. 죽은 사람의 머리채를 잘라서 담요로 만들고, 옷가지는 죄다 내다 팔아도, 살아있는 카티의 일용할 양식은 지키는 선의. 그들이 간직하고자 했던 인간성의 마지노선은 배고프고 시린 수용소에서 어떤 정신적 역할을 한 것일까?


'수용소의 행복에 대하여', '나는 여전히 피아노'는 <숨그네>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장이다.

수용소에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나서의 레오의 생각과 모습이 보인다.

급작스럽게 마지막 몇 장(章)만이 갑자기 현실에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었는데, 쳇바퀴 굴리듯 수용소 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5년 전의 어느 날 강제추방과 같이 뜬금없이 귀향 통보를 함께 받은 느낌이었다.


'수용소의 행복에 대하여'에서는 입의 행복, 머리의 행복, '한방울넘치는행복'이 나온다.

혹독한 기아를 수용소 생활 5년간 겪은 레오는 트라우마를 떨치기 쉽지 않다. 길에서 아사 직전의 상태로 구해진 길냥이들이 비교적 안정된 삶에서 본능만을 충족하기 위해 먹고 먹다가 뚱냥이가 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짠하다. 이성을 가진 사람도, 기아와 같이 직접 끔찍한 굶주림에 노출되지 않은 일반인도 식이 제한 다이어트 이후 폭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레오에게는 어떠했겠는가. 레오가 느낀 입의 행복이 어떤 충만감이었을지는 음식 섭취와 배부름 그 이상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것이 입의 행복이다.

책에 따르면 '머리의 행복은 어울리기 좋아하고 타인을 필요로 한다'라고 한다. 사실 나는 이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난해한 단어로 서술되어 있는데, 긍정적인 단어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 내가 일상 속에서 사람을 통해 겪을 수 있는 만족감일까?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반면에 '한방울넘치는행복'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소설 초반부, '이르마 파이퍼의 한방울넘치는행복' 장이 있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구분되지 않는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르마 파이퍼가 선택을 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고통스러운 이승으로부터 벗어난 일종의 환희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레오는 귀향 후에도 낯섦, 위화감과 가족 구성원 내에서 고립감을 느꼈다.

그가 겪었던 모진 풍파를 입 밖으로 꺼내 공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돌아온 레오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족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발설하지 않고도 이미 동성애자라는 죄인으로 사는 그였는데, 강제수용소 생활을 통해 방어 기제가 더 강화된 것이다. 그는 홀로 감내할 수밖에 없었고, 설사 우연히 수용소 동지를 만나더라도 그 무거운 침묵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음의 회복을 하지 못하고 일시적이나마 안정의 대상을 찾기 위해 '나는 여전히 피아노'에서 레오는 동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라는 선택을 한다. 아마도 결혼한 사람과 아이는 없었던 것 같다. 결혼 생활 11년 후에 혼자 오스트리아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이때 편지는 아내인 에마한테만 쓰였다. '두려움은 가차없지'.

레오는 여전히 랑데부를 갔고,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랑데부에서 썼던 별명이 일상 대화에서 언급될 때면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고, 남자의 외형에 홀린다. 동성애는 여전히 범법이었으므로 랑데부를 갔다가 체포되었을 경우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속으로 곱씹는 상태이다. 이런 모습은 수용소행 전의 청소년 레오가 엿보인다. 강제수용소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그의 내면은 자라지 못한 것이다. 그뿐이랴. 그의 사고 또한 수용소 안에 갇혀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60살이 넘은 레오가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수용소 인물들을 떠올리며, 강박에 시달리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으로 <숨그네>를 마무리한다.


1900년대는 가까운 과거였지만 산업 혁명 이후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대규모로 유통 가능하던 군수 물자,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 기술 덕분에 더 참혹했던 전쟁을 겪은 세기였다.

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고통받았고, 더 광범위한 지역이 폭파되었으며 안타깝게도 그러한 기억을 직/간접적으로 아직 안고 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 1980년대까지 이념 충돌로 인해 혹은 민주화를 위해 고초를 겪었던 생생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전쟁의 비윤리와 폭력, 폐허는 다큐나 르포를 통해 접하기도 한다. 또는 <안네의 일기>, <소년이 온다>와 같이 문학으로 주인공과 공감하며 간접 체험을 하기도 한다.

<숨그네>는 그런 방면에서도 전쟁 이후 수용소에 동원된 사람들을 비춰보고 있어 충격이었다. 소련/루마니아/독일 삼국이 엮였던 1940년대, 소련의 재건을 위해 강제 동원된 루마니아 거주 독일인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사실을 일절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는데 수용소에 간다는 맥락이 이해되지 않아서, 책을 읽다가 시대적 배경을 찾아보려고 잠깐 검색을 해보았는데 실화여서 놀랐다. 이렇게 세계사에 깜깜했다니. 아니면 의도적으로 지워진 전쟁 후의 그늘인 걸까? 숨그네의 문학적인 매력과는 별개로 책에서 전달하는 시대적 사실은 끔찍했다.


사실 <숨그네>는 이와 같은 배경을 전혀 모르고 우연히 읽게 된 책이다.

정보 수집 혹은 자기 계발을 위한 목적의 독서를 하다가, 자꾸 편식하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강제로 다른 분야의 책을 읽을 기회를 만들 수 있도록 독서 모임을 참여했다. <숨그네>로 모임 참가를 시작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수수께끼 같은 제목에서 이끌렸던 호기심이 결국 이 글까지 작성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오랜만에 읽는 외국 소설이었고, 특히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을 읽는 것은 처음이라 곰곰이 곱씹으면서 읽다 보니 나 스스로 생각했던 부분이 많았다. 흘러가던 생각을 글로 모아보니 꽤 많아 보인다.

더 나아가, 나와 관계가 없을 것 같았던 브런치 작가까지 신청하게 되었다. 원래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이 책을 감명 깊게 읽고 공감한 편이라, 내가 곰곰이 생각한 것에 대해 쪽글이라도 써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기록용 레포트나 보고용 자료가 아닌, 생각과 정신을 담은 글쓰기를 한 지가 오래돼서 도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2~3년 동안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이 책을 읽고 나의 사유도 잘 적는다면 누군가와 공감할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숨그네>를 통해 독서 경험을 늘리는 것뿐 아닌, 직접 소감문을 작성해볼 생각도 하고, 소설의 범주가 어디까지인가를 고려해보는 기회가 됐다.


<숨그네>를 읽으며, 소설이 맞는가? 에 대한 질문을 반복했다.

이유는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고, 줄거리보다는 사유에 관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에세이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직접 경험한 것을 쓴 게 아니고 허구의 인물을 창작해서 썼기 때문에 소설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종종 어떤 부분에서는 산문시 느낌도 받았는데, 이유는 함축적인 단어 사용과 친절한 묘사 그리고 섬세한 비유가 이미지를 형상화하며 여러 종류의 심상이 유도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수용소 막사 안의 68개의 침대 어딘가에 붙은, 혹은 레오의 머리에 붙어서 기생하는 이나 빈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배고픔의 천사가 지켜보는 아래에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고, 생과 사를 간당간당하게 넘나드는 <숨그네>의 생생한 묘사 덕분에 숨그네를 읽는 동안 왠지 모르게 소화 불량인 상태였다. 기분 탓이겠지... 너무 실감 난 나머지 급박하거나 안달 나고 절절한 느낌을 공감한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읽고 있기도 했다.

가장 다큐여야 할 것 같은 글에 아름다운 시가 들어와서 만들어내는 기괴함도 있었고요.

이 책을 읽고 온라인 독서 모임을 가졌을 때 다른 분의 감상 중에 한 문장을 인용해보았다. 대화 속에서 특히 공감했던 단어는 '기괴함'이었다.


기본적인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노동 기계'로 취급받던 강제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아사, 사고사, 그리고 탈출을 감행하다가 총살을 당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느릿하지만 섬세하고 친절한 묘사로 거칠고 참혹한, 굶주린 수용소 생활을 면밀히 들여다보았다.


레오, 안녕.

이제는 이별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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