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치료경력을 의견서에 기재하지 말아 달라던 피고인의 사연
필자가 국선전담변호사로 근무하면서 변론했던 피고인들 중에는 우울증 등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피고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에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았고, 예민한 반응으로 인하여, '업무방해, 폭행, 모욕' 등의 범죄를 저질러 처벌을 받게 되었다.
사건에 대한 기록을 검토하면,
피고인이 범죄를 저지른 이유가 정신적 어려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건들이 있다.
필자에게 특히 기억에 남는 피고인이 있다.
서울중앙지법 국선전담변호사 시절 변론했던 40대 후반의 여자 피고인이었다.
위 피고인은 동생을 위해서 고가의 나이키 운동화를 큰 마음먹고 구매했는데, 위 운동화를 신은 동생이 하루 만에 뒤꿈치에 상처가 생겼다.
피고인은 큰돈을 들여 산 나이키 운동화에 하자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가게로 찾아가 신발에 하자가 있다며 하자 접수를 하고 있었다.
피고인 입장에서는 정당한 항의표시라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주변사람들이 느끼기에 항의과정이 시끄럽다고 느낄 정도였던 것 같다. 그 가게 안에 있던 여자분이 피고인에게 "시끄럽다"면서 피고인의 왼쪽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이로 인해 경찰관이 출동했는데, 경찰관은 피고인이 가해자인 업무방해 사건에 대해서만 접수를 받고,
피고인이 폭행당한 사건에 대해서는 접수도 받아주지 않고 피고인을 건물 밖 도로로 나오게 해 동영상 촬영을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망신을 주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피고인은 경찰관이 편파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그 후 업무방해 사건의 피의자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경찰관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하고 소란을 피웠다는 공소사실로 기소된 것이었다.
필자는 기록을 검토하면서 피고인이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위 피고인에 대한 기존 판결문에는 피고인이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기록 검토를 마친 후 피고인과 접견을 하면서
필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신과에서 치료받은 적이 있으시죠"
그러자 피고인은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저 정신병 없어요’
필자는 다시 말했다.
"정신과에서 치료받은 적이 있는 경우,
그 사유를 양형상 주장을 하면 형량에 있어서 감경을 받을 가능성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정신과에서 치료받은 사실을 의견서에 기재하고
양형 감경사유로 주장하는 건 어떨까요."
피고인은 다시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변호사님, 저 정신병 없어요.
의견서에 제가 정신과에서 치료받았다는 내용은
적지 말아 주세요"
또한, 공소사실 인부와 관련하여
필자의 판단으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법리상 맞다고 생각했는데,
피고인은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에 필자는 피고인의 뜻에 따라 의견서에,
피고인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을 자세히 기재하여 공소사실 부인으로 내용을 정리하고,
피고인이 정신과에서 치료받았다는 내용도 기재하지 않았다.
필자는,
위 의견서를 피고인에게 보내주고 재판부에 제출했다.
필자는 법정에서 판사님께 피고인이 억울함을 느끼는 부분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고 변론을 마쳤다,
필자는 거의 100건 이상의 사건을 변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 사건을 변론한 후 또 다른 피고인들의 사건들을 변론하면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법정에서 변론을 마치고 법원 1층을 지나가는데,
어떤 여자분이 너무나 반가운 목소리로,
변호사님, 김혜영 변호사님이시죠, 저 000이에요"
라면서 필자의 팔을 잡았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니 그 운동화 사건의 피고인이었다.
필자가,
재판 끝났을 텐데 어쩐 일이세요”
라고 묻자, 그 피고인이 예전과 달리 부끄러운 듯이
“저 항소했어요. 그래서 법원에 왔어요”
라고 말했다.
계속된 재판으로 피곤했던 필자는
“네. 그러시군요. 재판 잘 받으세요”
라고 인사를 하고 가려고 하자, 그 피고인이 또다시 필자를 잡으며,
“변호사님, 저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요.
그때 의견서에 제가 정신과에 다닌다는 내용을 기재하지 않으셨잖아요.
저한테 의견서를 보내주셔서 제가 의견서를 확인했는데 정신과 다닌다는 내용이 없었잖아요"
"그런데, 판사님이 판결을 할 때 제가 정신과에 다닌다는 내용을 말씀하시고 벌금을 감경해 주셨어요"
"그래서 변호사님 만나면 의견서에 정신과에 다닌다는 내용 기재하지 않으신 거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났네요"
(위 사건은 피고인은 공소사실을 부인했지만, 증거에 비추어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피고인이 강력하게 공소사실을 부인하였기에 의견서에 공소사실 부인으로 기재했지만, 피고인이 억울함을 느끼는 이유인 본 건에 이르게 된 경위를 의견서에 자세하게 기재했고, 법정에서도 판사님께 피고인이 억울함을 느끼는 부분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고 변론을 마쳤다.
아마도 판사님은 피고인이 본건에 아른 경위 등을 이해해 주신 것 같았다. 그래서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면서, 여러 가지 양형사유들을 기재하는 과정에서 검사 측 증거로 제출된 기존 판결문에 기재된 양형사유도 참작하신 것 같다.
1심 재판부가 피고인의 영형사유를 잘 살펴봐주셨는지 합의 등의 사정이 없었는데도 벌금액을 감액해 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감액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000 씨가 정신과에서 치료받은 내용을 기재하는 걸 원하지 않으셔서 의견서에 그 내용을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000 씨도 의견서를 확인하셨잖아요"
라고 말했다.
위 피고인은
맞아요. 그걸 물어보고 싶었어요.
변호사님은 정신과 치료받은 내용
의견서에 기재하지 않으신 게 맞죠"
라고 다시 물었고,
필자는,
"네,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피고인은
변호사님,
제가 그 부분을 변호사님께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서 변호사님께 물어볼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변호사님 의견서에
제 입장을 자세히 적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변호사님께 감사인사도 못 드린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오늘 만나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감사인사도 할 수 있으니 정말 다행이네요.”
그리고 부끄러운 듯 필자에게 말했다.
"그리고 변호사님,
그때는 제가 조금 아팠던 것 같아요.
필자와 접견하고 재판을 했을 당시에는 필자의 질문에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주장했는데,
사건이 끝난 후 우연히 만난 피고인은
“그때는 아팠던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피고인의 상태가 나아지고 있구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토해야 할 기록이 많아 마음이 바쁜 탓에,
사무실로 돌아가 변론을 준비해야 하는 필자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는 피고인이 마냥 반갑지는 않았는데,
“그때는 아팠던 것 같다”는 말을 듣자
진심으로 기뻤다.
정신병원 위원회 위원이었던 동료가
필자에게 알려준 내용이 있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할 때 물어보는 질문 중에 하나가
"정신적으로 아팠던 것 같습니까"라는 질문이라고 한다.
이 질문에 대해서 "네, 제가 아팠던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면 퇴원을 하고,
"저 아픈데 없습니다” 또는 “저 정상이에요”라고 대답하면 퇴원하지 못한다고 한다.
스스로의 상태를 자각할 수 있다면, 이제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만큼 상태가 개선된 것이다.
필자가 변론했던 정신적으로 아팠던 수많은 피고인들 중에서 위 피고인처럼 스스로 아픈 상태였음을 인정한 피고인은 거의 없었기에
위 피고인의 “그때는 제가 조금 아팠던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들으니 재판으로 힘들었던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국선전담변호사의 업무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되고 힘들었다.
변론준비로 식사를 거른 날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래도
피고인들로부터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받을 때,
필자의 변론으로 피고인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을 느꼈을 때마다
피곤함이 사라지고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위 피고인이
지금은 그때보다 더 편안해진 상태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