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을 떠나 생활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시골 생활에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막상 기회가 오면 잡초도 구분을 못해서 애를 먹고는 한다. 그래도 한 해의 마무리를 전원에서 하자는 제안에 설렌다.
장소를 제공해 주겠다는 친구의 친구 세컨드 하우스 당진 세류동 집을 향했다.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친구가 집과 먹을 것까지 제공해 주겠다고 하는데 나는 차량 제공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운전을 자청했다. 처음 가는 시골길은 종착지를 10여분을 앞두고 네이비게이션 아가씨는,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계속 같은 길을 안내를 했다. 5번째로 반복된 제자리 돌기에, 네이비게이션은 더 이상 아가씨가 아니라 계집애가 되었다.
길을 잘못 이해한 듯싶어 이번에는 새로운 옆 길로 들어갔다. 드디어 길을 제대로 찾았다고 모두 좋아했다. 좋아한 것도 잠시, 도로가 점점 좁아지더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다. 좁은 농로는 막다른 길에 다다러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것이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뒤늦게 길을 자세히 살펴보니 경운기가 다니는 길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막다른 곳에 오토바이를 세워 놓은 작은 공터가 있었다. 진흙을 튕기며 30여분 왔다 갔다 하면서 겨우 빠져나왔다. 차바퀴는 덕지덕지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논두렁에 안 빠지고 어딘지도 모르는 인적 없는 곳에서 추위와 두려움으로 밤새 떨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네이비게이션 계집애는 땅 지번으로 안내를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종종 생긴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도착한 세류동 집을 보는 순간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의 한 숨이 나왔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팔과 어깨까지 아팠다.
세류동 집의 나지막한 하얀 철문과 뒤에 펼쳐진 평화로운 경치를 보니 힘든 시골 여정의 피로도 다 풀리는 듯했다. 집 앞에는 깨끗하게 정리된 밭이 펼쳐져 있고 한쪽에는 마늘 밭이 겨울을 나기 위해 두툼한 비닐로 덮여 있다.
듬성듬성 아직 선택받지 못한 배추와 한 두둑 가득한 파와 시금치, 상추가 파란 옷을 입은 채 소임을 다할 날을 위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씨 뿌리고 물 주고 뜨거운 햇빛 아래 땀 흘리며 잡초를 뽑는 힘든 과정을 생략한 재미있는 농촌 체험이 시작됐다.
처음 보는 친구들을 위해서 이부자리와 먹을 것을 싸서 들고 퇴근하자마자 집주인이 먼 길을 달려왔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밭작물을 수확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떨어진 기온에 칼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었지만 추운 줄 모르고 수확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비닐에 덮인 파는 뿌리째 뽑아 툭툭 털고 옆으로 납작하게 자란 시금치는 잎을 잡고 자르니 먹음직스럽게 빨간 뿌리가 드러난다.
내가 하나 뽑을 때 주인은 세 뿌리정도 뽑으며 빠른 손놀림을 하고 있었다. 마당 한쪽에 쌓여가는 밭작물을 보니 흐뭇하기만 하다. 이런 맛으로 밭 일을 힘들게 하는가 보다.
집에 가져가려고 뽑는 줄 알고 재미 삼아 도와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에게 나누어 주려고 바쁘게 일을 한 것이다. 대파, 쪽파, 시금치, 처음 보는 잎이 길쭉한 토종 배추, 상추 등 봉투에 골고루 나눠 담더니 방문 기념품이라고 한다.
어느새 시골 저녁은 어두워졌다. TV 속 '삼시 세 끼'처럼 불을 때서 솥에 밥을 짓자고 주장을 했지만 친구들은 적극적으로 반대를 했다. 밥은 포기하고 솥단지에 설거지할 물을 끓이기 위해 불을 때기로 했다. 무슨 호기인지 한 번 밖에 때 보지 못한 불을 잘 피운다며 큰소리쳤다. 나무를 얼기설기 넣고 사이사이에 종이로 불을 때 보지만 찬 바람에 축축해진 나무는 타 오르지 않고 매운 연기만 난다. 전기밥솥에 밥을 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너무 늦어지는 저녁밥에 핀잔만 들을 뻔했다. 바람을 타고 오는 연기에 눈이 매워 눈물과 콧물이 나와도 포기하지 못하고 열심히 불을 지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탁탁 소리를 내면서 불이 붙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 주위를 따뜻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기온이 영상이라면 불 주위에 둘러앉아 고구마도 굽고 이야기 꽃도 돌려가며 구울텐데 불은 혼자 외롭게 타 들어간다.
앙상한 가지와 추수로 황량해진 들판은 을씨년스럽기보다 쉼의 여유가 느껴졌다. 들판에서 불어 오는 바람에 날아 오는 깨끗한 공기로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땀 흘려 일구고 수확한 작물을 나누는 넉넉하고 훈훈한 이웃의 따뜻한 마음이 좋다. 여유롭고 한가하게 즐기는 것이 아니고 부지런해야 하는 전원생활은 역시 환상일 뿐이다. '주인장만큼 시원하게 손이 빠르거나 부지런하지도 못해서 하루 종일 굶고 일에 매여 밤에는 녹초가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니 주인장의 따뜻한 마음이 더 고맙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