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사랑 Jan 30. 2024

내가 일을 시작한 건 간병비 때문이었다.(1)

마흔넷, 꿈을 찾다.

출처 Freepik

 모든 것은 한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완벽한 전업 주부 생활 7년 차, 5살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던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아빠가 좀 이상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구급차를 부르고 병원에 달려갔던 그날, 나의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뇌출혈이라고 했다.

 병원 응급실에서 만난 아빠는 어디에 부딪혔는지 눈가에 멍이 들어 있었고 그마저 초점 없이 끔뻑거리고만 있을 뿐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119 앰뷸런스에 타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엠뷸런스에 실려오며 또 얼마나 버둥거렸는지 손과 발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엄마 말이, 오전에 침대에서 떨어지셨다고, 아마도 그때 머리를 다친 것 같다고 했다. 하루종일 잠만 자고 식사도 안 하시길래 뭔가 이상해서 엄마가 동생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 내용이 나에게 전달되었을 땐 이미 골든타임이 지난 때였다. 아파서 정신이 없는 그 와중에도 누군가 데려간다는 생각에 그렇게나 무서웠는지 아빠는 온 힘을 다해 저항을 했다고 한다.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을까..


 응급실에서 본 아빠는 말 대신 신음 소리와 격렬한 몸부림으로 아프다는 걸 표현할 뿐, 눈을 떠 나를 보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아빠는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뇌압을 내려야 한다며 수술도 했고, 한동안 그렇게 의식이 없었다.

 의식 없이 누워 힘겹게 숨 쉬고 계시던 아빠 얼굴은 아직도 문득문득 떠올라 나를 힘들게 한다.

 그리고 며칠 뒤 다행하게도 아빠는 두 차례 정도 의식을 차렸고, 눈도 마주치고 어눌하게나마 말도 하셨다.

단답식의 말과 고개 끄덕임 정도였지만, 어찌나 감사하고 또 감사했는지, 한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아빠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 이런 걸까.


  그렇게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엄마와 나는 희망에 부풀어 또 한 번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만약 우연이라면 참 잔인한 우연이다.), 그렇게 아빠 의식이 돌아오고 난다음 날은 어김없이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되곤 했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담담한 선고를 받아야 했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잘 버텨주었고,  희망과 절망이 널뛰는 날들이 며칠씩 지나갔다.

 중환자실은 면회가 자유롭지 못하다.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아빠를 혼자 두고 집에 와서도 혹시나 연락이 올까 봐, 그 연락이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놓치지 않아야 했기에, 매일 핸드폰을 머리맡에 두고 자야 했고, 샤워를 하면서도 연락을 못 받을까 봐 핸드폰을 세워놓고, 보면서 샤워를 했었다.

그러기를 두 달.



 

의식은 여전히 혼미하지만, 이제 고비는 넘겼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고비만 넘겼을 뿐, 뇌손상이 심해서 재활을 한다 해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될지 장담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기쁨도 잠시 우리는 또 다른 다음을 준비해야 했다. 옛말에 산 넘어 산이라 하지 않았던가.

아빠는 곧 일반병실로 갈 수 있었지만..


 무너졌던 하늘을 간신히이고 일어났다 싶었더니, 이번엔 하늘 위에서 폭탄이 떨어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