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연은 사고(事故)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서로를 '길바닥에서 만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거칠지만, 우리의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었다.
모든 인연은 사고(事故)에서 비롯한다.
각자가 하나의 문명이라면, 문명의 충돌이 있을 때 비로소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관계가 곧 인연으로 불린다.
세비야에서 그라나다로 향하는 기차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역무원이 급하게 달려오더니, 노선의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지정해주는 역에 내려서 기다리면, 버스를 제공해 그라나다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놀랍게도, 반복해서 말하지 않았고 단 한 번의 통보를 끝으로 당황스러워하는 승객들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다행히 가장 앞에서 들어서 상황 파악이 빨리 되었고, 옆자리에 앉은 외국인과 함께 사람들에게 상황을 전파했다.
"그래서 우리 다음 역에 내리라는 거죠?"
아주 익숙한 언어가 들렸다. 한 한국인이 '한국인 맞나?'라는 불안한 눈빛으로 말을 걸었다.
나는 자신 있게 내가 들은 바를 전했는데, 그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된 역에 도착했다. 그 역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역 중앙에 걸려있던, 버려진 쓰레기로 만든 거대한 그림이었고 또 하나는 나와 같은 나이였는데 이미 3개월 정도 배낭 하나를 매고 유럽을 돌던 청년이었다. 버스가 오기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렸는데, 그 청년은 내가 썩 마음에 든다며 귤 2개를 손에 쥐어줬다. 그는 바르셀로나로 간다고 했다. 후에 이 청년을 다시 만나게 된다.
버스에 올라 그라나다 중앙역으로 향했고, 오늘따라 한국인들을 많이 만나는 것 같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기차 안에서 '약속된 역'에 내리는 것이 맞냐고 물어보던 사람은, 덕분에 그라나다에 잘 도착했다며 저녁에 만나 선물을 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러자고 했고, 숙소에 짐을 풀고 숙소 앞 이사벨 광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는 내 어머니보다 불과 5살 어렸지만, 형으로 부르기로 했다.
그라나다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유는 단 하나다. 알함브라 궁전 때문이다.
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8세기까지 서고트라는 통일국가로 존재했다가, 아라비아인들의 침입으로 왕국이 멸망하고, 스페인 왕국이 재건되기까지 무려 800여 년동안 국토 수복 전쟁이 이어졌다. 15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가톨릭 깃발을 끌고 간 이사벨 여왕 앞에 그라나다 왕국 마지막 왕 보압딜은 왕궁 열쇠를 건네게 된다. 이후 스페인 제국으로 불리는 통일국가가 수립되었다.
즉, 아라비아 세력의 최후의 흔적이 남은 장소인 것이다.
참고로 10만 대군을 끌고 그라나다를 방문한 이사벨 여왕에게 한 항해사가 오더니 서쪽으로 계속 가면 중국으로 가는 길이 가까워지지 않겠냐며 후원을 해달라고 간청했다. 전쟁에 여념이 없던 이사벨 여왕은 그를 무시했다가, 그가 프랑스로 가겠다고 하자 그를 다시 불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데, 그의 이름이 콜럼버스였다. 이 위대한 역사의 현장 속 대표적인 건물이 알함브라 궁전이다.
숙소는 이슬람 상인들이 많은 언덕의 중턱에 위치해있었다. 세비야에서 만났던 채은도 마침 세비야에 도착했다고 하길래,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빠르게 형과 채은과 접선해 함께 언덕을 올랐는데, 매직 아워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일출 또는 일몰 후 30분 정도를 볼 수 있는 이 시간은, 하늘이 금색에서 보라색으로 변하는, 사진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황홀했다. 아니 먹먹했다. 금색은 곧 보라색이 되었고, 보라색은 짙은 남색으로 변했다가 검은색이 되었다. 그 변화는 빨랐지만 느렸다.
역사적인 현장의 첫 활동이 감동적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라나다에는 두 개의 대표적인 전망대가 있는데, 하나는 서쪽을 보고 있는 크리스토발 전망대고, 다른 하나는 알함브라 궁전을 볼 수 있는 니콜라스 전망대이다.
크리스토발 전망대는 사실 매우 작다. 작은 원형의 공간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을 뿐이라 다른 관광객은 없었다. 하지만 니콜라스 전망대는 시끌시끌했다. 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이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경치가 환상이었다.
궁전의 모습을 보고서야 왜 이곳에 사람들이 모이는지 느꼈다.
건축물을 보고 감탄을 하게 된 첫 번째 경험이었다.
웅장하지만, 섬세한,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왜 아라비아의 마지막 술탄이 스페인에서 물러나는 것은 아쉽지 않지만, 알함브라 궁전을 뺏기는 것은 아쉽다며 목 놓아 울었는지 알게 되었다.
형은 그라나다에 잘 도착한 것만으로도 좋은데, 함께 좋은 경치를 봐서 기쁘다며 선물로 신라면을 주었다. 장기 여행을 하는 사람에게 라면은 엄청난 비상식량이다.
채은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며, 조심스럽게 제안을 하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