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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Sep 04. 2023

사소해보이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고작 몇 분 가지고, 겨우 전화 한 통 가지고'가 너무 싫어서

인간은 감각에 크게 의존한다. 그리고 그 감각은 단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적 특성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은 소, 돼지, 강아지, 고양이 등의 상대적으로 크기가 큰 동물들의 죽음에는 몰입하게 되지만 먼지 같은 벌레의 죽음에는 무심하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크기랑 죽음의 가치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


문제의식을 느끼는 기준도 이와 비슷하다. 겉으로 보기에 커 보이는 문제들에는 많은 사람들이 설령 휘발적일지언정 분노하고 댓글을 쓰며 공감한다. 하지만 드러난 부분이 작고 사소해보이면 그 이면에 어떤 것이 있는지는 관심을 가져볼 생각을 하지 않고 냉담하게 흘려보낸다. 그래서 나는 앞서 주제를 고를 때 많이 다루어지고, 다수의 사람들이 심각하다고 여기는 문제보다는 남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경미하다고 믿지만 이면에는 뿌리 깊고 심각한 부조리가 숨어 있는 것들을 다루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그 문제들이 전혀 사소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사악하고 간교한 형태의 악덕들이라고 확신하며, 관련하여 내가 느낀 바를 상세히 논하고 나름의 객관적 분석을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글을 쓰기 전에 많이 고민했다. 문제의 보이는 외연만 놓고 보았을 때는 내가 언급한 것 이상으로 심각한 것들도 많았다. 나이가 20살 이상 많은 다른 성별의 부장님에게 사택에서 스토킹을 당하고 밤에 메신저로 "같이 바다 보러 가자."와 같은 말을 들으며 끙끙 앓다가 퇴사한 동기와 그 과정에서 사건을 숨기는 것만을 목적으로 회사가 보여준 각종 추태, 습관적으로 윤락업소에 들락거리고 심지어는 신입사원에게 이를 권유하며 “좋은 경험"을 시켜주겠다고 말하는 과/차장들, 특정 사원을 사실상 '은따'를 시키며 업무나 점심시간에 배척하는 고참 직원 등 6년 동안 눈 뜨고는 못 볼 도저한 추악함을 회사 곳곳에서 목격하였다. 언뜻 보기에 자극적이고 시선이 가는 건 이쪽이겠지만 나는 그럼에도 이것들보다 내가 논했던 문제들이 훨씬 중대하고 치명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들은 이미 현 시점에서도 회사 내부든 외부든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시스템보다는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설령 저런 사람들이 적지 않더라도 저런 행동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다. 그리고 저런 사람들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서 점에서 저것은 지속될 문화라기보다는 곧 사멸해가는 옛것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물론 아직도 저런 사람이 상당히 많음은 안타까운 일이긴 하다.


허나 대무자, 막내, 주말 전화 응대 등 내가 말했던 내용들은 다수가 그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거나 혹여 느끼더라도 "에이, 우리 회사말고도 이 정도는 다 하는데 이것도 못하면 사회생활 못하지."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방금까지 나와 함께 직장 내 성추행을 미친듯이 욕하던 선배도 이런 문제는 무관심하게 넘기고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고작 몇 분의 전화도 당신의 엄연한 노동이고, 겨우 전화 한 통도 당신의 피같은 휴일에 하는 노동이다. 왜 당신의 권리를 빼앗겨도 화내지 않는가? 왜 부당하게 수당을 떼 먹혀도 내 돈 달라며 맞서 싸우지 않는가? 심지어는 왜 회사편에 서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동료를 욕하고 따돌리는가?


나아가 돌아보면 가장 무서운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괜찮은데, OO씨 이미지 생각하면 이런 행동은 (자제하는 게/미리 해두는 게) 좋아."


이런 말을 하는 선배들은 인자한 미소와 아랫사람을 신경쓰는 듯한 유화적인 태도로 말을 하기에 겉으로 볼 때는 일견 일리 있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나 역시 이런 조언을 해주는 선배를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적절한 조율을 해주는 진짜 어른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런 사람들이 가장 무서운 형태로 암약하는 조직의 병원균이자 체제수호자였다고 생각된다.


저런 말로 후배를 타이르면, 일차적으로 후배는 지금 상황이 잘못된 것이지만 맞섰을 때 내가 피해를 입을 것을 걱정해서 선배가 내 안위를 보살펴준다고 여기고 태초에 가진 비판 의식이 점점 소멸해 간다. 그리고 나아가 나중에 자신도 후배가 들어왔을 때 현실을 깨닫고 그 테두리 안에서 융통성을 발휘하며 적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배웠던 내용을 후배에게 가르쳐 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순간 부조리는 맞서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우회해야 할 현실이 되고, 남 핑계를 대며 기실 본인의 눈엣가시를 지적한 선배는 탁월한 중간 세대의 조율자이자 그럴 듯한 어른으로 둔갑한다. 이런 부류가 나는 오히려 대놓고 남을 괴롭히는 사람보다도 더 악질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위에 적은 형태를 포함하여 내가 본 선배들은 모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였다. 정말 철저한 피해자와 가해자도 있었지만 모두 오랜 직장생활에 길들여져 사건의 가피(加被)가 불분명한 '이해당사자'였다.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사실이고 나는 그렇게 되기 전에 회사를 나온 것이 별로 특별할 게 없었던 내 인생에 있어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스스로 패배감을 느낀다. 나는 왜 내 후배가 막내라는 이유로 똑같은 부조리를 당할 때 그게 잘못되었다고 나서지 못했을까. 왜 나는 현재 대무자 지정이 어려우니 계획된 휴가 일정을 바꿔달라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을까. 터줏대감이 되기 전에 퇴사했기에 가해자만 되지 않았을 뿐 나 역시 영웅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거나 저녁 회식을 할 때마다 "우리 때는 저런 멋진 선배가 없었는데, OO씨 부럽다." 하며 어린 직원 앞에서 기존 사원들끼리 서로 치켜세워주는 모습을 보아왔다. 나는 부조리에 저항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멋지고 존경할 만한 선배라는 타이틀은 조직에서 시키는 것을 그저 기계적으로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에 저런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회사가 시키는 부조리에 저항하지 않고 그 안에서 적응해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이라는 점이 죄는 아니다. 그렇다고 존경을 받을 만하다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조직 내에서 오래 동화되다보면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자화자찬하며 부조리는 윤색되어 보이지 않게 되고 자정능력을 상실해 사무실에는 못 봐줄 꼴의 사람들만 남게 된다. 모두들 어느 순간 존경받을 만한 선배는커녕 추잡하고 고약한 선배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딱히 난 당신에게 존경할 만한 선배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로부터의 존경은 원래 받기가 쉬운 것도 아니거니와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는 과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내가 아닌 남의 일에 나서 달라는 주제 넘은 당부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당신의 권리를 부당하게 제한받을 때는 반발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대단히 적극적으로 시끄럽게 목소리를 낼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연하다는 듯이 수당 없는 야근을 시키고, 휴가를 포기하게 하고, 막내라는 이유로 업무 쓰레기통이 된다면 그 때는 단호하게 거부했으면 한다.


그렇게 하면 회사에서 이러한 부조리가 없어지지 않더라도 그것이 위축되게는 할 수 있다. 적어도 당연한듯 부당한 것을 요구하는 문화는 없어질 것이다. 혹시 아는가? 그러다 보면 정말로 문화가 바뀔지도 모른다. 정부와 재계가 이것을 나서서 개선시켜줄 것이라고는 여전히 기대하지는 않지만, 다수의 근로자들이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 이상의 것을 요구받았을 때 단호히 거부한다면 윗선에서도 그것을 절대 무시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시장에서 근로자는 철저한 약자라지만, 장담컨대 다수의 약자가 일관되게 거부하는 것은 아무리 강자라도 함부로 강요할 수 없다. 그러니 당신의 월급 1원, 연장근로 1분, 반차 1개에 민감해졌으면 한다. 반격하지는 못해도 회사에게 길들여져 사연 많은 당신의 봇짐을 자발적으로 내놓지는 말아 달라. 특히 적어도 본인의 당연한 권리를 챙기는 사람을 회사에 편승하여 공격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좋은 게 좋은 것이라 스스로 억지로 되뇌이고, 사소하지 않은 것을 사소하게 여김으로써 스스로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모쪼록 당신의 권리에 항상 예민하고 민감해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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