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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신입 Sep 01. 2023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제도, 대무자

자유로운 휴가를 방해하는 주적(主敵)

기업 본사의 인력 구조는 효율을 중시한다는 명목으로 업무 분장을 큰 틀에서 나누고, 한 명의 담당자가 해당 직무 영역에 대해서 전적으로 담당하는 식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정유사 국내영업본부의 멤버십마케팅팀에서 멤버십 카드 관련 업무를 맡는 것이 내 직무라면 나는 해당 카테고리의 모든 업무를 주 담당자로서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교대근무를 통해 같은 직무를 여러 명이 수행하는 공장이나,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는 사원들이 여럿 모여 있는 지사 조직과는 다른 본사 직무 체계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지사나 공장에도 내근직 등 한 영역의 업무를 전적으로 혼자 담당하는 직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사에 있는 직무는 전사적인 차원의 업무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개인이 맡는 업무의 규모과 범위가 매우 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직장인들의 능력은 경쟁사회에서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어렵고 무거운 업무라도 금방 적응해서 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더불어 기업의 ERP, 인사시스템, 협업툴 역시 갈수록 기능이 좋아져 같은 업무를 수행할 때도 과거보다 효율이 상승하여 한 명이 많은 업무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허나 이렇게 많은 영역의 업무를 한 사람이 할 때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은 바로 '휴가'이다. 아무리 그 사람이 슈퍼맨이라고 한들 기계가 아닌 이상, 그리고 한 사람의 노동자인 이상 어떤 순간은 하던 일을 내려놓고 휴가를 가야 한다. 문제는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업무를 떠맡아서 하다보니, 그 일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 본인 밖에 없게 되어 휴가 중 그 업무 관련 문의를 어떻게 처리할지 애로사항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에서는 '대무자'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다시 말해 평소에 그 업무를 담당하지는 않지만, 해당 업무의 담당자가 휴가를 갔을 때 그 업무를 일시적으로 대신할 사람이 바로 대무자이다. 보통 이러한 대무자는 업무분장에서 '정' 담당자, '부' 담당자로 나누어 정 담당자가 자리를 비웠을 때 부 담당자가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 부 담당자도 다른 업무에서는 본인이 정 담당자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휴가로 인해 대무자 역할을 하게 되면 자신의 원래 역할에 더해 다른 사람의 업무를 대신하는 것까지 떠맡게 되는 것이다.


이러니 휴가를 썼을 때 눈치가 보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다른 사람이 내 일을 대신해야 하는데, 그 사람은 평소보다 업무량이 늘어나니 내가 장기휴가를 갔을 때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 직장인의 휴가가 길어봤자 일주일, 집중휴가 등의 자체 제도를 가진 회사라고 해봤자 2주일이 고작인 것이다. 이렇게 쓰고 남은 법정휴가의 나머지는 어쩌다 하루씩 산발적으로 쉬는 식으로 소비하게 된다. 본인의 주 업무가 아닌터라 해당 업무가 익숙하지 않은 대무자로부터 업무 관련 질의 때문에 전화가 계속 오는 것도 흔한 일이다. 실제로 내가 휴가 중 들었던 말을 하나 공유해보겠다.


"휴가 중인데 미안해요 OO씨, 그런데 이번 ~~ 관련해서 사전에 협력사로부터 공유된 내용이 있나요?"


위 문장은 그 자체로 모순 덩어리이다. 휴가 중인데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본인 역시 휴가 중에 업무적 연락을 하는 게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미안하고 원칙에 어긋난 일인 줄 알면 전화를 하지 않으면 되는데, 전화 후 미안하다고만 할 뿐 바로 업무적인 내용을 물어보는 것은 대체 무슨 짓이라는 말인가. 입으로는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잘못을 동시동작으로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에 대해 '아니 본인 업무를 대신해주는 사람이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에 대해서 전화할 수도 있지. 본인 업무에 책임감이 없는 것 아니야?'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적절한 지적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업무 시간에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것은 직원의 책임감이 문제라 할 수 있겠지만, 휴가 때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책임을 다 하지 않은 것이라 여기기 어렵다. 회사에서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휴가를 갔을 때도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같은 직무를 함께 수행할 담당자를 추가로 채용해서 한 직무 당 인력을 두 명 이상으로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므로 이는 회사의 책임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서 한 명에게 과중한 업무를 부여하고 그 인력의 공백에 대한 대비는 하나도 하지 않아 놓고, '대무자'라는 미봉책을 만들어서 일시적으로만 어떻게든 해결하고 회사의 책임을 직원들에게 분산시키고 있으니 이런 문제와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더불어 비슷한 논리로 연차촉진제도를 준용한다며 직원들에게 연차휴가 사용계획을 받아놓고, 실제로는 말도 안 되는 업무량을 부여해서 휴가 사용을 어렵게 만든 뒤에 우리가 연차사용을 독려했는데도 네가 스스로 안 간 것이니 수당을 지급하지 않겠다며 악용하는 것이 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살인적인 업무량을 부여받아서 물리적으로 업무 시간 내에 끝내기 어려운 것이 명백한 상황임에도 그것의 책임이 직원 쪽으로 가게 되는지 모르겠다. 아닌 말로 외국에서는 열심히 해도 못 끝내는 업무를 주지도 않겠지만, 설령 주더라도 할 수 있는데까지 하고 그 업무가 끝나지 못해서 생기는 손해는 과업의 분배를 적절히 하지 못한 회사의 책임일 뿐 계획한 휴가는 철저하게 사용할 텐데 말이다. 나는 결국 대무자라는 개념이 기업이 필요한 돈, 다시 말해 인건비를 안 쓰고 이를 직원에게 전가해서 발생하는 문제이자 우리나라의 직장인들이 스스로 그 부조리에 저항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감내할 뿐이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너 말고도 일할 사람은 많다.'고 생각하는 사용자들이 갑자기 돈을 풀며 충분한 인력을 확충해서 건전한 인력 구조를 만들 리는 없다. 하지만 직장 동료가 쓴 휴가에 눈치를 주는 사람들이라도 없어진다면 우리의 마음만이라도 조금은 편할 수 있을 것이다. 동료가 휴가를 써서 대무자가 된 당신의 추가 업무는 회사로 인한 것이지 당신 동료 때문이 아니다. 회사로 향할 불만을 동료에게 수평폭력으로 토해내지 말자. 그리고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기업이 쓸 돈을 제대로 써서 대무자를 신경 쓸 필요 없이 휴가를 갈 수 있는 인력구조를 만들게 압력을 넣을 수 있도록 하자.


이처럼 결국 업무란 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임에도 업무적 공백을 직원 개개인이 책임지는 현상 역시 반드시 바뀌어야 할 우리나라 기업문화의 뿌리깊은 부조리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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