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부심이 교만으로 넘어가는 바로 그 순간
"그건 우리 같은 사무직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야.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지."
위는 지금은 연락을 잘 하지 않게 된 내 대학 동기 모임에서 지인이 했던 말이다. 이러한 말이 나오게 된 경위는 이렇다.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다가 졸업 후 취업하여 대부분 직장인이 되고 나서 오랜만에 만난 자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화제가 우리나라와 외국의 노동 조건을 비교하는 것이 되었다. 당시 나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과 우리나라에서의 노동자 권리 보호를 대비하며, 지금 우리 대부분이 썩 규모가 큰 기업에 다니는데 포괄임금제나 야근 수당을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지인의 답변이 바로 저것이다.
나와 달리 불문과를 졸업해 프랑스를 더 잘 안다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이 프랑스에 교환학생 갔을 때 만나 아직까지 알고 지내는 프랑스인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면 그 곳 역시 사무직은 고강도의 업무에 시달리며 뉴스에서 보는 노조의 파업이나 실업수당, 여름 내내 이어지는 장기 휴가 등은 육체적 노동자의 경우에만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다른 얘기로 제약회사의 2년차 해외영업 담당인 그녀는 당장 바로 아래의 1년차 후배가 저녁에 연락이 안 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외국을 상대하는 직무는 시차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퇴근 후 연락을 할 수밖에 없는데 퇴근했다고 자신의 거래처 연락을 받지 않아 '포인트 오브 컨택(Point of contact, 아마 업무 응답처의 통일성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이 달라져 고생이라며 궁시렁 댔다.
나는 그녀의 말이 두 가지 측면에서 심각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프랑스에서 사무직은 실업수당을 받기 어렵다거나 장기 휴가를 못 간다는 말부터 잘못되었지만 이는 여기서 굳이 더 상세히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고, 바로 하기 본론으로 넘어가겠다.
첫째, 밤에 연락을 받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업무 시간이 아닌데 연락을 안 받는 것은 근로자의 천부적인 불가침의 권리다. 물론 거래처 입장에서도 업무 당사자의 연락처가 바뀌면 당연히 불편하다. 하지만 업무적인 것보다 우선되는 것이 바로 법이다. 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끔 비효율이 발생하고,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야간 연락이 잦다면 표준적인 일과시간을 담당하는 직원이 퇴근한 뒤에 교대로 야간 근무를 설 사람을 추가로 채용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이 과정에서 연락처 관리가 다소 힘들어지더라도 그것은 회사에서 감내해야 할 사항이지 근로자가 신경쓸 바가 아니다. 업무를 통해 돈을 버는 것은 회사이고, 노동자가 자신의 태생적 권리마저 포기하며 회사의 작은 불편까지 해결해주려고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되었다.
그녀가 말한 '포인트 오브 컨택' 같은 번지르르한 소리로는 이와 같은 본질적인 부분을 절대로 가릴 수 없다. 조금 편견 어린 말일 수 있지만 내 경험상 취업을 천신만고 끝에 힘들게 한 사람일수록, 주체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인 사람일수록 철저하게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회사의 입장'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소위 말해 회사 '뽕'이 찬 사람일수록 저런 말을 할 확률이 높고, 저것은 각자의 개인적 가치관을 배제하고 법과 원칙이라는 객관적 기준에서 생각해보면 당연히 그릇된 가치관이다.
둘째, '노동자'라는 표현에 대해서 매우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바로 윗 동네의 영향인지 '노동'이라는 말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고 정치적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녀뿐만 아니라 사무직은 노동자가 아니고, 노동자란 육체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여럿 보아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노동자는 블루 칼라든 화이트 칼라든 사용자가 아닌 상태로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업무를 하는 사람을 모두 포괄한다. 가령, 우리나라에는 두 영역의 노동자를 모두 포괄하기 위한 '고용노동부'만 존재하지, 사무직은 노동자가 아니니까 따로 주무 부처로 '고용근로부' 같은 것을 만든 적은 없다. 엘리트 의사나 변호사여도 페이 닥터나 로펌 소속으로 일하면 노동자라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동기 및 선후배들 중에 본인이 노력해서 이룬 것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게 발전하여 대기업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육체노동자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깔보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꽤 많이 본 바 있다. 실제로 그녀가 저 말을 했을 때도 나는 비슷하게 강한 차별적 뉘앙스를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이런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나는 그런 사람과 지인으로서 지내온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만 든다. 팀워크를 발휘하려고 조직에 들어왔는데 다른 동료들을 깔보고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직장인으로서도 무능한 사람들이다.
조직은 절대 당신이 하는 직무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당신이 어떤 노력을 해서 해당 조직에 들어가 그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고, 그것의 연봉이 얼마이며 회사에서 패스트 트랙을 밟기 좋은 요직이건 아니건 회사에서 누군가는 당신이 그렇게 낮추어보는 일을 해야 한다. 석유화학회사와 정유회사에서 오퍼레이터가 없으면 누가 공장을 운전하며, 홈쇼핑 회사에서 AMD가 없으면 누가 그 많은 방송 코드 설정을 할 것이며, 통신사 대리점에서 직접 최종 고객을 상대하는 상담원이 없으면 누가 단말기를 팔아서 당신이 열심히 개발한 요금제를 써주겠는가? 그들이 없으면 지금 당신의 연봉도 없고 자리도 없다. 부디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서로의 직무 수행에 고마움을 가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솔직히 이런 말을 듣는다고 그런 사람들이 반성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처럼 공채와 비공채, 학벌이 좋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무직과 현장직, 남자와 여자 등 회사 내의 수많은 타자화와 여기서 비롯된 혐오와 갈등은 분명히 우리나라 기업문화의 슬픈 자화상 중 하나이다. 사내 갈등 중에는 생산적인 갈등도 있겠지만, 이런 류는 절대로 그런 쪽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나는 이것 역시 단기간에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솔직히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는 각 개인이나 특정 집단으로부터 시작된 일탈이 아니라 학생 때부터 학교에서 처절한 경쟁을 시키고, 부자와 빈자를 구분짓도록 가르치며, 회사 차원이 아니라 사회가 직접 나서서 만든 승자독식의 구조에 기인한 유서 깊은 갈등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종류의 혐오는 자신이 승자로서 항상 이겨왔다는 도취감과 노력으로 꽉 채워져서 바뀔 수가 없음을 알지만 꼭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아닌 말로 아무리 명망 있는 기업에 근무한다고 한들 당신이 그 기업의 총수는 될 수 없지 않은가? 부디 당신 역시 보통의 노동자임을 알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