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자살'연재중입니다._“삐삐쳐도돼?”"그래, 맨정신에"
"김 전무님, 듣기로는 M사는 인원을 정리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C사는 당분간 신규 수주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고 들었습니다."
김 전무와 차담을 가지며 조금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김 전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습니다.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으니 협력사들도 하나둘씩 버티지 못하고 있죠. D사, G사도 요즘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게요. 시장이 쉽지 않네요.“
커피 한 모금을 넘기며 말했다.
"하지만 이런 위기가 오히려 기회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를 선별하고, 내부 조직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분명 쉽지 않은 환경에 나도 부담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시장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내 의견에 동의라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는 김 전무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회사 내부 인력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김 상무는 여전히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뛰고 있었고, 박 부장과 최 차장은 신규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일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것은 분명 박 부장과 최 차장에게도 부담일 것이다. 바쁜 와중에 부담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최 차장은 요즘 어때요?"
내가 김 전무에게 물었다.
"아, 여전히 꼼꼼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다만, 좀 버겁다고 하네요. 경험이 부족한 인력이 많다 보니 최 차장이 다 감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박 부장은 성과는 좋았지만, 팀워크를 해치는 일이 잦았다. 반면 최 차장은 조용히, 하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박 부장은 좀 다듬어야겠죠? 최 차장이랑 밸런스 맞춰서 이번 D사 건 맡겨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김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 상무는 아직도 광주 현장 때문에 정신이 없지요?"
"시행사가 자꾸 변화 없이 시간만 끌고 있으니, 현장 직원들도 이탈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김 상무 성격이 워낙 꼼꼼해서 버티고는 있는데 녹록지 않은 듯합니다. 일전에 대표님과의 미팅 때는 결정된 것처럼 얘기하더니, 계속 시간을 끄는 모양입니다."
"음. 조금만 더 지켜보시지요. 다른 직원들은 어떻게 보세요? 이 대리는 잘하고 있는 거 같은데... 자료 정리도 빠르고, 세심한 면이 있는 거 같은데."
"근데 좀 내성적인 게 흠이라면 흠인 듯합니다.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는데 어느 정도 배웠다 생각하면 이직하겠다고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그렇지요. 쓸만하면 이겨내지 못하고 이직하는 것이... 기껏 열심히 가르쳤는데 떠나면..."
김 전무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대리, 과장급이 되면 권태기를 이기지 못하고 이직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우리 직업의 특성이었다.
"회계팀 정 과장은 요즘 힘들어 보이던데... 지난 분기 결산 때 자료 정리하다가 야근 너무 많이 하는 거 같은데... 전무님, 정 과장한테 휴가나 작은 포상을 했으면 하는데..."
"네, 그 친구 성격이 워낙 책임감 강해서 자기가 다 떠안으려 하죠."
김 전무가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방안을 강구해보겠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직원들 한 명 한 명의 상태를 챙기는 게 대표로서 내 역할이었다. 시장이 아무리 험해도, 결국 회사는 사람이 움직이는 법이다.
주제를 바꿔 협력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회사는 일을 해야만 수익을 만들 수 있고, 그래야 회사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D사는 여전히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지만, H사는 최근 불확실해진 상황이었다. 이런 협력사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가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가 될 터였다.
"대표님, 이런 시기일수록 믿을 수 있는 파트너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김 전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존에 관계사들 말고 협력사를 좀 더 늘릴 필요도 있을 듯합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다른 회사들도 몸을 사릴 테고, 그런 중에 우리가 일을 잘 처리한다면 이 불황의 시기가 지나고 우리에게 지속적인 파트너십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요즘에 쉬운 현장은 없다고 인지하고 있어서... 쉽지 않은 현장을 잘 마무리했던 회사 초창기의 처음처럼 그 일을 잘해낸다면 분명히 기회가 될 듯합니다."
"그렇죠. 그때는 수주 한건 한건이 너무 소중하고 절실했으니...그럼 기존 협력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규 거래처를 확보하는 방안을 찾아보시지요. 저도 좀 더 열심히 알아보겠습니다. 위기는 위기지만, 우리 같이 작은 회사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이 좋을 때는 어차피 메이저 회사들이 다 수주해버리니... 이번 기회에 적극적으로 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김 전무는 커피 한 모금을 넘기고 테이블에 시선을 집중하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 역시 커피 한 모금을 넘기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씨는 이 어려운 부동산 시장과는 상관없이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Time 1.
수능이 끝난 지 일주일, 11월의 끝자락은 가을이라기보단 여름의 꼬리를 물고 있는 듯했다. 고3의 무게가 어깨에서 내려앉은 자리에, 이제는 대학 합격 여부에 대한 새로운 불안이 자리 잡았다. 그날 저녁, 나는 R과 단둘이 신림동의 작은 술집에 마주 앉아 있었다. 익숙한 공초 냄새와 소주병이 놓인 테이블, 이곳은 우리가 처음 미팅했던 그 주점이었다. 우연인지, R이 일부러 이곳을 골랐는지 알 수 없었다.
“수능 잘 봤어?”
R이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수능을 치러낸 안도감 때문인지 맑았다.
“뭐… 그냥 문제는 열심히 봤지, 이래 봬도 시력이 1.5야 양쪽 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R은 처음에 무슨 말인지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시간이 좀 지나고 이해를 했는지 나의 시답잖은 농담에 큰 소리로 웃었다.
“넌?”
빈 술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나? 나도 시력이 1.0이라.”
난 어이없다는 듯이 쉰 웃음소리를 냈다.
R은 살짝 웃으며 잔을 들었다.
“어디 지원했어?”
내가 물었다.
“나? 비밀. 너는?”
“나도 비밀.”
“학교는 아니더라도 과는 말해 줄 수 있지 않나?”
R이 다시 물었다.
“그냥… 성적에 맞춰가야지.”
내 대답에 R이 피식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이 무더운 공기를 잠시 가볍게 만들었다.
소주잔을 몇 번 돌리며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시험장 분위기, 친구들이 지원한 대학, 그리고 D가 수능 끝나고 바로 PC방에 처박혀 스타크래프트만 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웃음이 터질 때마다 테이블 위의 소주병에 술이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나는 R의 눈빛에서 무언가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 하는 기색을 느꼈다.
“그나저나…”
R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너, 그때 미팅 기억나?”
“미팅? 그… 우리 처음 만났던 거?”
내가 되묻자 R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몸을 바싹 기댄 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그때 J, H, 그리고 나… 너랑 Y, D랑 만났던 거.”
“당연히 기억나지. 그때 Y가 영등포 얘기 하다가 완전 쫄아서 웃겼잖아.”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때… 사실 모두가 좀 솔직하지 못했어.”
R의 목소리가 맑았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솔직하지 못했다니?”
“그때 J랑 너랑 커플로 연결되는 분위기였잖아. 근데… 사실 J는 너 말고 Y를 좋아했었어.”
“뭐?”
나는 순간 멍해졌다. J와 나는 미팅 이후 몇 번 만났지만, 결국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때는 그냥 성격 차이인 줄 알았는데.
“J가 Y를?”
“응. 근데 Y는… 뭐, 너도 알다시피 나랑 사귀었으니까. J는 분위기 때문에 너랑 연결된 거지, 마음이 거기 있었던 건 아니야.”
R의 말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미팅의 분위기가 떠올랐다. 모두가 웃고 떠들며 술잔을 기울였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억지로 맞춰가는 느낌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럼 너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R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의 손이 소주병을 잡았다 놓았다 했다.
“나? 나도… 사실 그때 너를 좋아했었어.”
그 순간, 술집의 소음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R의 말이 내 머릿속을 울렸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거짓은 없었다.
“나를?”
“응. 근데 J랑 네가 커플로 묶이는 분위기라… 그리고 Y가 나한테 적극적으로 다가왔으니까, 그냥 그렇게 된 거야.”
R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New Kids On The Block의 노래. 나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 미팅에서 R의 웃음소리, 그녀가 내 농담에 맞장구치던 모습, 그리고 Y와 함께 있을 때도 가끔씩 나를 힐끗 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다. 아니,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도…”
내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지만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R이 고개를 들고 나를 봤다.
“나도 그때 너 좋아했었어.”
R은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엔 안도감, 그리고 약간의 미련이 섞여 있었다.
“우리… 참 바보 같네.”
그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다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엔 어색함보다는 묘한 따뜻함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그리고 어쩌면 그 타이밍을 놓쳐버린 청춘의 한 조각을 마주하고 있었다. 소주잔을 다시 채우며 나는 물었다. 이승철의 노래 중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라는 노래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럼 이제는? 지금은 어때?”
R은 잠시 생각하더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 글쎄… 대학 합격하면 생각해볼게.”
“야, 그건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내가 웃으며 항의하자, R도 따라 웃었다. 그 웃음은 예전 미팅 때처럼 맑고, 조금은 아련했다.
우리는 다시 대학과 미래 얘기로 돌아갔다. 난 “뭐든 되겠지”라며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그 대화 속엔 미래에 대한 설렘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는 그저 이렇게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할 뿐이었다.
술집을 나왔을 때, 신림동의 골목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R의 집까지 바래다주며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R이 말했다.
“가끔 삐삐 쳐도 돼?”
“그래. 맨정신에.”
R이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녀가 2층 계단을 올라가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담배 한 대를 물고 골목을 걸어 나왔다. 수능이 끝난 신림동의 밤은, 여전히 뜨겁고 어지러웠다. 그날의 우리에게는 '청춘'이기에 솔직했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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