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자살'연재중입니다. “그거 소용 없다니까”
*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독자님의 '구독'이 큰 힘이 됩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블라인드를 통해 사무실 안으로 스며들며 단단한 나무 바닥에 긴 줄무늬 그림자를 드리웠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끊임없는 맥박이 희미하게 들려왔다—자동차 경적과 멀리서 울리는 공사 소음이 뒤섞인 소리였다. 민호 형님의 사무실 안은 조용했다. 내가 유리 테이블 위에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나는 작은 소리만이 고요를 깼다. 맞은편에는 10년 넘게 알고 지낸 건설 관리 회사 대표 민호 형님이 앉아 있었다. 그의 맞춤 양복은 단정했지만, 살짝 구부정한 어깨는 최근 부동산 업계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민호 형님은 가죽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손에 든 커피 잔을 살짝 흔들었다.
“내가 이 바닥에서 20년을 굴렀는데, 이 시장이 어디로 튈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수많은 호황과 불황을 겪으며 쌓인 피로가 묻어났다.
“어제만 해도 아파트 청약률이 역대 최고니 어쩌니 하더니, 오늘은 정부 규제가 목을 조르는 꼴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모서리에 펜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게요.”
나는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쓴 맛이 입안에서 퍼지며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형님 쪽은 어때요?”
민호 형님은 코웃음을 치며 잔을 내려놓았다.
“알면서 묻냐? 어렵지~ 어려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올해 1분기 수도권 미분양 물량이 작년보다 20% 늘었어요. 이 추세면 하반기엔 더 심해질 거 같은데.”
민호 형님은 흘깃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정부가 자꾸 금리 올리고 대출 문턱 높이니까, 투자자들 숨통이 막히는 거지. 젊은 층은 아예 내 집 마련 꿈도 못 꾸고, 30대 중반만 돼도 전세로 버티다 결국 점점 밀려나니.”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근데 웃긴 건, 이런 와중에도 강남이랑 한남동 쪽은 여전히 뜨겁다는 거야. 돈 있는 놈들은 규제든 뭐든 다 뚫고 들어가.”
나는 피식 웃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형님, 요즘 E건설이나 H사 같은 대기업들 움직임이 좀 이상하던데.”
민호 형님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이런 질문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E건설? 그쪽은 최근에 내부 인사 이동 때문에 좀 시끄러워. 박 대표 얘기 들었지? 골방에 처박혀 있던 그 양반이 갑자기 본사로 복귀했잖아. 업계에서 다들 얼마 못버틸 꺼라고 했는데 그 무시를 다 받아내고 참더니...결국 아마 복수의 칼춤이 추게 될 거야. 자기 ‘골방늙은이’라고 무시한 넘들은 벌벌 떨고 있겟지”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H사는 해외로 눈 돌리고 있어. 동남아 쪽, 특히 베트남이랑 인도네시아에서 대규모 복합 단지 프로젝트 추진 중이야. 국내 시장이 이렇게 불안정하니까 다들 탈출구를 찾는 거지.”
"L건설 얘긴 저도 들었어요. 박 대표가 돌아온 게 그냥 인사 이동이 아닌 거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내부 파벌 싸움에서 누군가 밀린 거겠죠?”
나는 민호 형님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이런 뒷얘기에 누구보다 빠삭했다.
“그리고 H사 해외 진출은 좀 의외네요. 국내에서 워낙 보수적으로 굴러가던 곳이라.”
“그렇지. 근데 해외 진출도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 수익으로 연결되려면 시간도 필요하고 뭐 해외진출이라는 이름 값을 얻으려는 거지 실제 수익률은 높은 편이 아닌데 뭐하는 짓인지. ”
민호형님이 커피를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자, 이제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우리는 정장차림의 사람들로 가득 메운 인근의 참치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늘 가던 곳이라 주인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고 조용한 자리로 자리를 안내했다. 따로 주문을 넣지 않아도 서빙을 하는 직원이 맥주와 소주를 가져왔다.
맥주와 소주의 일정 비율로 채우고 우리는 시원하게 들이켰다.
지난 이야기, 앞으로의 부동산 시장이야기로 몇 순배 잔이 돌 때 쯤 먹음직한 참치가 테이블에 세팅이 되었다. 참치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 놓고, 몇 순배 반복이 되자 조금씩 취기가 올랐다. 하지만 민호형님과의 이런 대화가 좋았다. 머릿속으로 계산하지 않아도 특별한 접대가 없는 나 그대로의 모습. 떄로 진지한 토론이 술상에 화두로 올라올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서로의 감정이 상하기 전에 마무리가 된다는 점이었다.
창밖으론 해가 저물며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불을 밝혔다. 서울의 불빛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고, 그 불빛 속에서 우리의 미래도 빛날 수 있기를 바랐다.
Time 2
눈을 뜨자 시계는 7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간단히 샤워한 후 밖으로 나섰다. '신축 아파트 분양! 최고의 위치,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문구가 적힌 알록달록한 전단지를 주차된 차 앞유리에 한 장씩 꽂으며 길을 따라 걸었다. 지인의 소개로 집을 떠나 경기도 외곽의 싸구려 여관에서 분양 영업을 시작한 지 이제 보름 정도 되었다. 아직 실적은 없었다.
파산의 상처는 여전히 생생했다. 끝없이 쌓인 빚. 모든 것이 나를 짓눌렀지만, 어차피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나는 해내야만 했다.
전단지 더미가 반으로 줄 무렵, 모델하우스에 도착했다. 누구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하고 누구는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전단지에 내 연락처가 박힌 도장을 열심히 찍어내고 있었다.
같은 팀원인 민철이 형이 말을 걸었다.
"또 오면서 차치기(전단지를 차에 꽂는 행위) 하면서 왔냐?"
나는 손으로 계속 도장을 찍어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네."
"그거 소용없다니까. 매일 같은 길을 오면서 같은 차에 차치기 한다고 답이 나오겠냐?"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자랑인 건가'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마음의 소리를 전달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절실함이 다른 상황. 무엇도 하지 않으면서 우연히 방문한 고객에게 자신의 운을 맡기는 대부분의 영업 사원들. 그들의 시간을 굳이 뭐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나의 길을 가면 된다. 그때 팀장이 우리를 불러 모았다. 아침 조회 시간이었다.
조회가 끝나고 나는 가방에 열심히 찍어 놓은 전단지를 가득 채웠다. 아침 조회가 끝나고 대부분의 영업사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하거나 컴퓨터 모니터로 뉴스를 검색하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나는 가방을 들쳐메고 일어서자 민철이 형님이 다시 말을 건넸다.
"야, 점심 먹고 나가지 벌써 나가냐?"
"네, 그냥 점심 먹기 전에 한 바퀴 돌아보려고요."
"에이, 소용없다니까."
나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모델하우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 이따 뵐게요."
목적지도 없고, 종착지도 없었다. 그냥 발길이 이끄는 대로 전단지를 뿌리며 걸음을 옮겼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거친 숨을 헐떡거렸다. 가끔씩 가슴을 울리는 지난 시간의 회상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지만, 그런 감정의 사치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다시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해가 지고 거리는 어두워졌다. 손은 전단지를 너무 오래 쥐고 있어서 뻣뻣했고, 발은 하루 종일 걷느라 퉁퉁 부었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현수막이었다. 사다리를 세우고 가로등 기둥과 전봇대에 현수막을 걸었다. 손이 부르트도록 밧줄을 묶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했다.
늘 그렇듯이 반복된 하루의 시작. 출근길에 차치기를 하고, 도착해서 도장을 찍어내고, 민철이 형님의 푸념으로 시작되는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거기 아파트 분양 상담하는 곳 맞죠? 전단지 봤는데, 자세히 알아보려고요."
순간,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네, 네! 물론이죠! 언제든 편하실 때 상담해 드릴게요!"
갑작스런 전화에 서둘러 펜과 노트를 찾았다. 첫 고객이었다. 비록 방문 예정에 불과했지만, 내겐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미친 듯이 뛰었다. 전단지를 돌리고, 새로운 거점에 현수막을 더 걸었다. 손이 터지고 발이 부르터도 멈추지 않았다. 상담 전화를 걸며 새로운 고객을 찾았다.
"고객님, 한 번만 상담받아보세요. 후회 안 하실 겁니다!"
거절당해도, 무시당해도, 다시 전화했다. 이거 아니면 죽겠다는 심정이었다.
한 달이 지났다. 상담 요청이 조금씩 늘었다. 그리고 그중에 일부는 계약으로 이어졌다. 첫 수수료가 들어왔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가벼워졌다.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
어느 날 밤, 현수막을 걸다 우연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조명에 가려 희미하게 빛나는 별이었지만, 별은 늘 그 자리에 있고, 그 별을 발견하느냐 못 하느냐는 결국 개인의 몫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별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별을 절실하게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절실하게 고객을 찾으려 하는 것처럼.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거기에 나의 시간을 보태자면...
'즐기는 자는 절실한 자를 이길 수 없다'